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안드레스 솔라노 콜롬비아 출신 소설가
어느 날, 길을 걷던 중 나의 주의를 끄는 무언가를 보았다. 헤어스타일이나 옷차림이 독특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본 건 매우 비싼 유모차를 밀고 있는 젊은 여성이었다. 마침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등이 빨간색으로 바뀌었고 나는 아기를 관찰하기 위해 조금 더 가까이 유모차 쪽으로 다가갔다. 남 일을 들여다보기 좋아하는 못된 버릇인 점 인정한다. 하지만 글쟁이 중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나? 아무튼, 유모차 안에는 놀랍게도 아기가 아니라 개가 앉아 있었다. 털 안으로 분홍색 피부와 분홍색 귀가 보였으니 개가 분명했다. 순간, 한국엔 정말 중간이란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양탕’을 파는 식당이 있는가 하면, 반려견이 사람보다 귀하게 대접받는 곳도 있다. 개 얘기는 아니지만 다른 예를 들자면, 과거에는 일부 교사가 학생들을 체벌하며 괴롭혀서 문제가 됐는데, 이제는 학생과 부모들이 교사들을 자살로 내몰 정도로 괴롭히는 경우가 드물지 않게 보인다.
한국인과 개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개라는 존재는 한국인에게 분리된 개념으로 보인다. 한편으로는 애정을 주고받고 돈을 써야 하는 도시의 사람들이 키우는 반려동물이라는 존재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농촌의 마인드와 미신이 도사린 오래된 사회 속에서 몸을 보신시켜주는 음식으로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개를 왕처럼 대하는 것도 ‘영양탕’으로 취급하는 것도 불편하다. 종류는 다르지만 두 경우 모두 폭력적이다. 어째서 개가 네 발로 길을 걸으며 바닥에서 맡을 수 있는 냄새를 모조리 맡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가? 동물로서의 본질을 무시하고 인간 아기처럼 대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렇게 대하면 ‘주인’은 어떤 중요한 심리적 결과를 얻게 되는가? 개에게 꼭 필요하지 않은 물건에 돈을 쓰는 이유가 무엇인가? 개에 대한 존경과 사랑의 척도가 결코 개에게 지출한 금액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요사이, 개고기 소비가 다시 한번 공론의 장으로 돌아왔다. 처음으로 양대 정당이 모두 개고기 소비를 금지해야 할 때라는 데 동의했다고 한다. 앞으로 몇 년 안에 개고기 소비가 사라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하지만 개를 ‘반려’ 동물로서가 아니라 정서적 상품으로 인식하는 풍조가 늘어난다면 폭력적인 뉴스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번 논의가 한국인과 개의 관계를 전반적으로 살펴보는 계기가 되길 빈다. 판매를 위해 강아지를 더 작게, 소셜미디어에 예쁘게 나오도록 품종을 실험하는 개 사육장은 식용으로 개를 사육하던 농장들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안드레스 솔라노 콜롬비아 출신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