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리포트] 베이글에 빠진 한국
《최근 베이글 열풍이 거세다. 미국이나 유럽 도시에 여행을 온 듯한 베이글 집이 MZ세대 사이에 ‘인증샷 명소’가 되고 일부 베이글 집에서는 아침마다 ‘오픈런’이 벌어지기도 한다. 대기업까지 베이글 시장에 뛰어들었다. 베이글의 인기 요인을 살펴봤다.》
런던 베이글 뮤지엄 잠실점에서 판매하는 베이글. 롯데백화점 제공
인고의 시간을 견디는 이들의 한 가지 목표는 바로 ‘베이글’이다.
베이글 전문점 ‘런던 베이글 뮤지엄’이 들어선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몰 1층. 매일 아침 개장 시간에 맞춰 ‘오픈런’(매장 문을 열기 전부터 대기하다가 뛰어가는 것)이 벌어지는 진풍경을 볼 수 있다.
이곳은 현재 롯데월드몰에서 손님이 가장 많이 몰리는 곳으로, 인기 연예인도 줄을 서야만 발을 들일 수 있었다. 롯데월드몰을 운영하는 롯데그룹의 신동빈 회장조차 만인과 평등하게 줄을 서야 한다는 우스갯소리마저 나온다. 7월 삼성그룹 계열사 구내식당 조식 메뉴로 이 가게의 베이글이 등장하자 MZ세대(밀레니얼+Z세대) 직원들로부터 ‘완벽한 직원 복지’란 찬사가 쏟아질 정도였다.
● 한국 거리마다 불어닥친 베이글 열풍
베이글 전문점 ‘마더린러’에서 판매하는 베이글 샌드위치. 마더린러 제공
베이글은 20세기부터 미국 뉴욕을 중심으로 인기 아침 식사 메뉴로 자리매김했다. 미국 드라마 ‘프렌즈’ ‘섹스 앤드 더 시티’ 등에서 아침에 커피 한 잔에 베이글을 먹는 장면이 자주 나오곤 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동안 베이글이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베이글 특유의 퍽퍽한 식감 때문이었다. 아침 식사용 빵의 제왕인 식빵의 장벽을 넘어서지도 못했다.
● 먹음직스러운 비주얼에 인증샷 맛집으로
베이글 자체도 인스타그램용 사진을 찍으면 잘 나오는 이른바 ‘인스타그래머블(instagramable)’한 아이템인 만큼 사람들은 ‘굳이’ 줄을 서서 이곳에 입장해 베이글 사진을 소셜미디어에 올리며 해외 여행을 온 듯한 느낌을 만끽했다. 베이글은 동글동글하고 큼직해 직관적이면서도 먹음직스러운 모양새를 하고 있다. 또한 위아래가 납작해 겹쳐 쌓기 쉬워 다양한 형태로 연출할 수 있다. 인스타그램, 틱톡 등에 사진이나 영상을 올리는 게 자연스러운 일상인 젊은 소비자들이 베이글 사진이나 영상을 선호하는 이유다.
자신에게 아낌없이 지출하는, 이른바 ‘스몰 럭셔리’ 소비를 지향하는 MZ세대 소비 성향과도 맞아떨어진다. 분위기 좋은 매장에서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누리려는 이들의 수요를 적당히 비싼 디저트인 베이글이 충족시켜 주는 셈이다.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인 3일 오후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몰 ‘런던 베이글 뮤지엄’ 매장 앞. 이날 오전 예약을 마친 이들은 입장을 기다리며 줄지어 서 있었고, 예약을 놓친 사람들은 아쉬운 표정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송진호 기자 jino@donga.com
● 베이글 확산에 ‘K베이글’ 정통성 논쟁까지
베이글이 확산되자 한국 시장 특유의 ‘로컬리제이션’(현지화)을 통해 한국의 맛이 들어간 베이글이 늘어나며 한 단계 진화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국인의 입맛에 맛는 베이글이 개발돼 점차 자리를 잡았다. 당초 베이글은 미국 뉴욕 스타일의 현지 방식을 살려 퍽퍽한 식감을 강조했는데,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베이글 전문점들은 대부분 한국인이 좋아하는 떡처럼 부드럽고 쫀득한 식감을 내세우고 있다. 이른바 K베이글이라 불리는 베이글들은 크림치즈에 대파, 마늘, 팥 등 한국적인 재료가 들어간 게 특징으로 꼽히기도 한다. 일부 소비자 사이에서는 한국식 베이글은 정통 베이글로 볼 수 없다는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신규 창업자뿐만 아니라 기존 동네 빵집에서도 베이글이 주력 상품으로 떠오르고 있다. 동네 빵집에서도 유명 베이글 가게를 통해 베이글이 널리 알려지면서 일종의 낙수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고 했다. 베이글의 유행은 인플루언서들의 성지로 불리는 성수동 일대에서 시작됐지만 이젠 서울은 물론이고 지방 골목에서도 베이글 판매점을 쉽게 찾을 수 있을 만큼 퍼져 나갔다.
서울 송파구에 사는 손수민 씨(35)는 3개월 전부터 베이글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1년 전 차린 카페 안에 ‘가게 속 가게’ 형태로 베이글을 따로 팔기 시작한 것이다. TV든 인스타그램이든 베이글로 가득한 모습이 자주 노출되자 “이거다” 싶었다. 손 씨가 기대했던 대로 사람들의 반응이 좋았고, 입소문도 나면서 배달 애플리케이션(앱)에서 동네 맛집으로 오를 정도로 순항하고 있다.
베이글 열풍이 거세지자 대기업까지 가세하는 분위기다. 파리바게뜨는 지난해 12월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에 있는 선릉아이타워점을 베이글 특화 매장이자 신제품을 시험하는 공간인 ‘베이글 랩(Lab)’으로 재단장했다. 베이글 랩에서는 기본 베이글 외에도 베이글 피자, 샌드위치 등 베이글을 이용한 이색적인 메뉴들을 가장 먼저 만나볼 수 있도록 했다. 뚜레쥬르에서도 올해 1∼7월 베이글류 매출이 전년 대비 58%가량 상승하는 등 인기를 실감하고 있다. 이에 뚜레쥬르는 건강식과 담백한 빵 수요에 맞춘 베이글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국내 커피업계 1위 스타벅스도 최근 베이글의 식감을 기존 제품보다 쫄깃하게 바꾼 ‘탕종 베이글’ 3종을 선보이며 매장 곳곳에서 품절 사태가 나기도 했다.
● “인기 유지될 것” vs “식빵에 가성비 밀려”
외식업계에서는 베이글의 인기가 얼마나 이어질지가 관심사다. 빵을 포함한 디저트는 유행이 빠르게 변하는 특징을 갖는다. 마카롱이 한 예다. 2018년 전후로 국내에 마카롱 붐이 일며 전문점도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당시 마카롱은 가운데 크림이나 초콜릿 등을 잔뜩 넣은 ‘뚱카롱’(뚱뚱한 마카롱)이 등장하며 전성기를 맞았으나, 현재는 인기가 예전만 못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20년 전후 유행했던 크로플도 마찬가지다. 크루아상 생지를 와플처럼 눌러 만든 독특한 비주얼로 큰 인기를 끌었지만 지금은 시들하다.
식품업계에서는 베이글의 인기가 이제 시작 단계에 불과해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본다. 건강식 유행이 지속되는 만큼 달지 않고 담백한 맛을 앞세워 국내 식사용 빵 시장의 한 축으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본다. 파리바게뜨 관계자는 “프랜차이즈들도 본격적으로 뛰어든 만큼 베이글이 대중화 단계를 밟아갈 것”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베이글은 식빵처럼 빵에 크림치즈 같은 양념을 발라 먹는 등 다양한 연출이 가능하다. 취향에 맞게 만들어 먹는 ‘나만의 레시피’가 성행하면서 발전 가능성이 높다. 샌드위치나 토스트, 피자 등 다른 요리의 재료로 활용할 수 있다는 강점도 있다.
반면 다른 빵이나 디저트류와 마찬가지로 일시적 유행에 그칠 것이란 의견도 적지 않다. 특히 가격이 걸림돌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국내 베이글 전문점들은 플레인 베이글의 개당 가격을 4000원 안팎으로 책정하고 있으며, 제과점의 경우 통상 2000원 안팎이다. 이는 식사용 빵의 대명사인 식빵 한 통 가격과 비슷한데, 양까지 감안하면 베이글의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권용진 대구가톨릭대 외식조리학과 교수는 “베이글은 태생적으로 대량 생산이 어려워 가격 메리트를 갖기 어렵다”며 “이를 극복할 수만 있다면 이미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변화된 만큼 꾸준히 인기를 얻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송진호 기자 jin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