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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바지길 자전거길 고양이길… 사람들 떠난 소도시 살린 아이디어[전승훈의 기자의 아트로드]

입력 | 2023-10-07 01:40:00

일본 오카야마현 구라시키의 시내 중심가에는 작은 개울이 흐른다. 수양버들 가지가 늘어진 아치형 다리 위에서는 관광객들이 나룻배를 향해 손을 흔들어준다.17세기 그림 속 에도시대 모습이 그대로 살아난 듯한 풍경이다.


한때 번성했던 동네가 쇠락한 후 사람들이 떠나 버린 마을은 고민이 크다. 강원 태백, 정선 등 한때 탄광촌으로 북적였다가 폐광이 된 후 인구 감소를 겪었던 도시가 대표적. 일본정부관광국(JNTO)이 추천한 주고쿠 지방의 히로시마와 오카야마의 소도시 명소들도 마찬가지였다. 자전거길과 고양이길, 애니메이션을 활용해 도시의 ‘지속가능성’을 이어가는 참신한 아이디어를 엿볼 수 있는 여행이었다.

● 에도시대의 풍경을 담은 마을
일본 오카야마현의 구라시키는 일본 최초의 방직공장이 있던 작은 소도시다. 시내 중심에는 청계천만 한 작은 개울이 흐른다. 백조가 노니는 개울가에는 수양버들 나뭇가지가 늘어져 있고, 관광객을 태운 작은 배들이 떠다닌다. 그림에서만 보던 에도(江戶)시대의 풍경이 그대로 살아난 듯하다.

구라시키 미관지구는 우리나라의 익선동 골목길처럼 일본 전통 목조가옥들이 밀집해 있는 골목길이 이어진다. 골목길에는 바퀴 2개가 달린 인력거가 다닌다. 강변을 걷다 보면 전통가옥 사이에 그리스 신전처럼 이오니아 양식으로 지어진 석조건물이 우뚝 솟아 있다. 1930년에 문을 연 일본 최초의 근대미술관이자 사립미술관인 오하라(大原) 미술관이다. 엘 그레코의 ‘수태고지’를 비롯해 고갱, 마네, 모네, 마티스, 르누아르, 피카소, 칸딘스키 등의 서양미술사 걸작들이 이 작은 미술관에 모여 있다. 오하라미술관을 세운 사람은 구라시키 방적 창업자인 오하라 마고사부로다. 그는 동갑내기 친구인 화가 고지마 도라지로를 5년 동안 유럽에 유학시켜주었는데, 두 친구가 유럽에서 서양미술의 명작들을 사들였던 이야기는 일본의 미술 컬렉션 역사에서 전설로 내려온다.

청바지 천으로 만든 각종 패션 소품을 파는 구라시키 데님 거리의 눈길 끄는 간판. 

골목길을 걷다 보면 빨간 벽돌로 된 창고 건물도 만나게 된다. ‘아이비 스퀘어(Ivy Square)’라고 불리는 서양식 호텔과 전시장, 식당가로 구성된 복합공간이다. 원래는 1889년에 지어진 일본 최초의 방직공장이었다. 덕분에 구라시키에는 푸른색 질긴 면직물인 ‘데님’으로 만든 패션 소품을 파는 가게들이 몰려 있어 ‘청바지 골목’ ‘데님 천국’으로 불린다.

구라시키에서 100주년을 맞은 마스킹테이프 판매점 내부의 제품 진열대 모습. 

현재 아이비스퀘어 전시장 별관에서는 마스킹테이프로 유명한 ‘가모이 mt 10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마스킹테이프는 젊은층 사이에서 ‘다이어리 꾸미기’용으로 인기가 높은 문구용품. 구라시키에 본사를 두고 있는 가모이는 100년 전 차량에 페인트를 도색할 때 페인트가 묻지 않아야 하는 부위에 붙이는 공업용 도구로 마스킹테이프를 개발했다고 한다. 그런데 고객들이 마스킹테이프를 예쁜 인테리어 도구로 사용하고 것을 보고 문구용으로 업그레드한 4000여 종의 마스킹테이프를 개발했다는 스토리다. 구라시키의 대부분의 옷가게, 기념품숍의 쇼윈도에는 ‘가모이 mt 100주년’을 알리는 깃발이 달려 있어 마스킹테이프 열렬 애호가들의 발길을 모으고 있었다.

● 버려진 염전마을, 마을 분산식 호텔
일본 히로시마의 다케하라(竹原)는 소금과 사케 주조업, 대나무 죽세공품으로 번성했다. ‘히로시마의 작은 교토’로 불릴 정도로 번성한 세토내해의 항구마을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염전이 사라지고, 소금 생산량이 대폭 줄면서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나가게 됐다.

다케하라의 미치나미 보존지구에는 지금도 전통가옥과 쇼렌지 절과 신사 등이 남아 있다. 대나무가 유명한 마을이라서 그런지 공중전화 박스는 대나무로 장식돼 있고, 수로 위에는 아치형 대나무 공예가 장식돼 있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소도시 마을이다. 꽃 모양의 바람개비가 돌고 있는 골목길에서는 전통 주조장에서 시음하고, 술잔과 수저 인형 등 민속 공예품 쇼핑도 즐길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다케하라가 젊은이들의 발길을 불러오기 위해 TV애니메이션을 활용했다는 점이다. 일본 젊은층에겐 영화보다 TV애니메이션 시리즈가 더 인기이기 때문이다. 다케하라에는 여고생 사진부원들의 우정을 그린 애니메이션 ‘다마유라(たまゆら)’의 포스터가 곳곳에 붙어 있는데, 이 마을의 명소와 건물들이 실사처럼 담겨 있다. 보존지구 끝자락에 있는 조그마한 사당은 애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원작 촬영지로도 유명하다.

다케하라의 오래된 민가를 개조한 마을분산형 호텔 니포니아 입구(위 사진)와 호텔 객실 내부.

다케하라에서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아이디어는 마을 분산형 숙박업소 ‘니포니아(Nipponia) 호텔’이다. 시골의 비어 있는 고민가(古民家)를 숙소로 활용해 조성한 마을 호텔이다. 체크인은 ‘호텔 리셉션’으로 쓰이는 집에서 하고, 객실 A동은 이 골목에 있고, 객실 B동이나 레스토랑은 저 골목에 있는 식이다. 고객은 체크인 후에 방을 찾아가고, 식사를 하기 위해 작은 골목길을 찾아다니며 독특한 재미를 느끼게 된다. 호텔 내부는 오래된 민가를 현대적인 인테리어로 개조해 묘한 분위기를 풍긴다. 니포니아 호텔은 인구 감소로 쇠락해가는 농촌마을 전체를 하나의 부티크 호텔의 세계관으로 만들어버리는 로컬 브랜딩 기업인 셈이다.

우리나라에도 경북 안동, 경주 등에서 한옥스테이, 고택스테이가 인기를 얻고 있다. 종갓집처럼 크고 멋진 한옥 건물에서 잠을 잘 수 있지만, 대부분 개인이 운영하기 때문에 서비스의 질은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다. 반면 니포니아 호텔은 기업이 운영하다 보니 전문적인 호텔 교육을 받은 직원들의 리셉션이나 레스토랑의 고객 서비스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니포니아 호텔은 일본 전역에서 오래된 민가를 활용한 호텔 10여 곳과 함께 성, 신사, 절 등의 문화재 등을 활용한 숙박시설도 13곳에서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 자전거족과 고양이 집사의 성지

오노미치 고양이 오솔길에 놓여 있는 복돌 고양이. 

일본에는 사이클 성지로 불리는 장소가 있다. 바로 세토내해의 8개 다리를 가로질러 달릴 수 있는 ‘시마나미카이도(しまなみ海道)’다. 혼슈의 오노미치에서 시코쿠의 이마바리까지 약 70km 거리의 자전거 코스다. 세토내해의 수천 개의 작은 섬과 아름다운 바다가 어우러지는 풍경이 환상적이다. CNN이 선정한 세계 7대 자전거 코스 중 하나로, 사이클링 숙련자들은 3∼4시간이면 완주할 수 있어 전 세계 사이클 마니아들이 찾아온다.

오노미치 해운창고를 개조해서 만든 자전거족을 위한 호텔 복합시설 ‘U2’. 

시마나미카이도의 출발점에 있는 오노미치(尾道)에는 해변 창고를 개조해 만든 자전거족 전용 호텔 U2가 있다. 오노미치도 한때 해운 물류의 집산지로 번성했지만, 1960년대부터 주변 공업지역으로 사람들이 빠져나가면서 도시의 매력을 잃어갔다. 약 2000㎡ 크기의 콘크리트 해운창고를 이용해 만든 U2에는 호텔과 함께 레스토랑, 카페, 바, 기념품숍 등이 있다. 호텔 방에 자전거를 걸어놓고 잠을 자고, 아침 먹고, 쇼핑하고, 와인과 위스키를 마실 수 있는 복합공간이다. 자전거 브랜드 자이언트(Giant) 판매점도 있어 자전거 부품 수리도 할 수 있다.

세토내해 섬을 연결하는 사이클 도로 ‘시마나미카이도’가 내려다보이는 센코지산 전망대. 

오노미치에 들렀다면 로프웨이를 타고 센코지산 정상에 오르는 것을 추천한다. 전망대에 오르면 세토내해의 섬들과 바다, 도시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내려올 때는 ‘문학의 길’로 꾸며진 산길로 걸어 내려오는 것이 좋다. 하산길 막바지에 사진 명소인 덴네이지 삼중탑이 나오는데, 이곳부터 우시토라 신사까지 약 200m 구간이 유명한 ‘고양이 오솔길(猫の細道)’이다.

이 길에는 예술가 소노야마 슌지(園山春二)가 1998년부터 돌을 색칠해 만든 ‘복돌 고양이(福石猫)’가 계단과 담장, 풀숲 곳곳에 숨어 있다. 실제 고양이처럼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숨어서 사람들을 지켜보는 모습이 귀엽기 그지없다. 예술가는 담벼락 시멘트가 갈라진 틈의 모양을 그대로 이용해 고양이의 몸통이나 얼굴, 발바닥도 그려 넣었다. 예쁜 복돌 고양이가 놓여 있는 ‘고양이 오솔길’은 고양이 집사들에게 꼭 한번 와보고 싶은 성지가 됐다. 사람들이 떠났던 도심의 산동네에 활기가 생겼고, 빈집을 개조해 만든 미술관이나 카페, 공방들에는 고양이 캐릭터를 활용한 기념품이 관광객들의 발길을 모은다.



일본 히로시마·오카야마=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