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 좋은 계절이다. 나는 2002년 처음 마라톤을 시작했고, 그해 가을 춘천에서 열린 국제 마라톤대회에 나가 풀코스를 완주한 적이 있다. 그 당시 기록이 5시간2분. 빠른 기록은 아니지만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완주를 했다는 데 큰 의미를 뒀다. 그 후에도 풀코스를 5번 더 뛰었지만 시간은 크게 줄어들지 않았다.
시간을 단축하려면 체계적으로 훈련을 해야 하는데 나는 바쁘다는 핑계, 마라토너가 될 것도 아닌데라는 핑계로 노력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달리기의 매력, 특히나 마라톤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기에 주말마다 10km 대회도 나가고, 하프 마라톤 대회도 많이 나갔다. 그러다 우연한 자리에서 황영조 감독을 만난 적이 있었다.
“감독님, 저도 마라톤 풀코스 완주한 경험이 있습니다!” 내가 자랑하듯 얘기를 했더니 감독님은 “기록이 어떻게 되세요?” 물어봤고, “5시간2분이 최고 기록입니다!” 말씀드렸더니 “대단하시네요. 저는 두 시간만 뛰어도 힘들어 죽겠는데 어떻게 다섯 시간을 뛰세요? 정말 대단합니다!” 주변 사람들은 감독님의 재치 있는 답변에 호탕하게 웃었지만 나는 웃지 않고 속으로 생각했다. ‘아, 내가 황영조 감독님보다 오래 달리는 건 잘하는구나!’
얼마 전, 오랜만에 마라톤대회에 참가했다. ‘실종아동 돕기’ 의미가 있는 마라톤대회였고 11.19km를 달리는 대회였다. 대회 1주일 전부터 체력 관리를 했고 70분 안에 들어오는 걸 목표로 컨디션을 조절했다. 대회 당일, 오랜만의 마라톤대회라서 그런지 잠을 설쳤고, 미리 주문한 운동화가 배송 지연으로 도착하지 않아서 나는 낡은 운동화를 신고 출발 선상에 섰다. 잠시 후 출발 휘슬이 울렸고 나는 내 페이스대로 달렸다. 1km당 6분 페이스를 유지하며 달리다 보니 어느새 반환점을 돌고 있었다. 출발할 때는 선선한 날씨였는데 반환점을 돌 즈음에는 가을 햇살이 따갑게 내리쬐기 시작했다. 땀은 비 오듯 쏟아지는데 주최 측에서 준비한 물은 미지근했고, (참고로 달리기를 할 때는 찬물을 마시면 심장이 무리를 줄 수 있다) 급격하게 체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한 발자국만 더 가자! 이런 심정으로 포기하지 않고 달렸다. 처음에 나를 앞질러 갔던 사람들이 모두 걷고 있었고, 나는 그 사람들을 추월해서 달렸다. 그리고 내가 지쳐서 천천히 달리고 있을 때 나 또한 누군가에게 추월당했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과 엎치락뒤치락 달리다 보니 어느새 마지막 1km.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달렸고, 69분30초 기록으로 결승점을 통과했다. 참가자 중에서 80등 성적이었고, 나는 매우 만족했다. 사실 50대가 되면서 여러 가지 면에서 의기소침해 있었는데 이번 마라톤 완주 덕분에 큰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집에 오는 길, 목에 걸린 완주 메달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처음 마라톤 완주하고 20년이 지났는데, 그래도 체력 관리는 잘하고 살았구나. 건강하기만 하다면 무슨 일이든 다시 도전할 수 있다, 힘내자. 그리고 남들이 정한 빨리 달리기의 기준 대신, 내가 정한 오래 달리기의 기준으로 삶을 대하자.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말처럼, 나는 그냥 내가 정한 방향으로 포기하지 않고, 꾸준하게 가면 된다. 어떤 방향으로 가더라도, 제자리걸음만 아니면 지금보다 상황은 좋아질 테니까.
이재국 방송작가 겸 콘텐츠 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