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학자의…’ 펴낸 김시덕 작가 서울 장독대-재개발 벽보를 사료로 폐간판 등서 도시 생멸사 읽어내
강원 삼척시 ‘칠성미장원’. 출입문의 글씨 ‘신부 화장’은 과거 이곳이 결혼을 앞둔 젊은이들로 북적였음을 보여준다. 김시덕 작가 제공
“현대 서울의 역사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장독대와의 투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울시는 전근대적이라는 이유로 ‘장독대 없애기’ 운동을 벌여왔지만, 여전히 도심 한복판 작은 마당엔 장독대가 남아 있습니다. 장독대는 농촌과 도시의 라이프스타일이 부딪히는 ‘문명의 충돌’을 보여주는 사료입니다.”
전국 곳곳의 거리와 골목을 누비며 한국 사회를 포착해 온 그는 전날에도 서울 서초구 말죽거리를 답사하며, 어느 다세대주택 마당에서 오래된 장독대를 발견했다고 했다. 그는 “그 장독대는 1966∼1970년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이 추진했던 ‘장독대 없애기 운동’ 속에서도 살아남은 것”이라며 “농촌을 떠나 서울에 정착한 무수히 많은 이들은 여전히 도시에서의 삶과 충돌하며 농촌에서의 생활방식을 지켜왔다는 증거”라고 했다.
폐간판에서도 도시의 생멸사를 읽어낸다. 2020년 강원 정선군 신동읍 예미리에선 ‘은하미장원’이라는 간판을 내건 상가를 만났다. 문을 닫은 채였지만, 간판 하단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신부 화장’이라는 손 글씨가 보였다. 그는 “그 폐간판은 한때 광공업으로 번성했던 작은 마을에 수많은 청춘 남녀가 살았다는 걸 통해 산업의 변천사를 드러낸다”고 했다.
원래 김 작가의 연구 분야는 동아시아 전쟁사였다. 임진왜란부터 1945년 종전된 태평양전쟁에 이르는 역사를 분석해 지난해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메디치미디어)를 펴내기도 했다. 현대사 연구에 대한 갈증이 있던 차에 눈에 들어온 것이 거리였다. 손 글씨로 쓰인 옛 간판부터 곧 철거될 상가 건물 출입구에 적힌 이름 모를 사장의 작별인사까지, 모두가 현대 시민의 삶을 보여주고 있었다.
김 작가는 “현대 시민의 문헌은 거리에 있다”며 “당대를 살아낸 피지배계층의 생생한 목소리를 사료로 남겨야 훗날 풍부한 미시사를 그릴 수 있다”고 말했다. “21세기 문헌학자로서 저는 날것의 목소리가 드러난 거리의 문헌들을 수집해 이름을 붙이고 기록할 뿐입니다. 먼 훗날 이 시대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증거 자료가 없단 이유로 시민의 역사를 공백으로 남겨 두는 일이 없도록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