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고수들의 신박한 인생 기록 비법-4회 <표재명 고려대 명예교수>
최근 자신의 인생을 자서전으로 남기는 분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좋은 글을 쓰려면 우선 글감이 되는 인생의 자료를 잘 모아두어야 합니다. 글쓰기 고수들의 신박한 인생 기록 비법을 내·손·자(내 손으로 자서전 쓰기) 클럽이 소개합니다.
표재명 고려대 명예교수의 40대 시절. 박정원 이화여대 연구교수 제공.
“인간 실존의 기본 구조는 인간이 자기 자신과 갖는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실존적 인간은 고독하지요. 실존적 고독은 어떠한 상호 교제에 의해서도 극복될 수 없습니다. 진리 역시 그러하여 나와의 관계 속에서만이 진리인 것입니다.”
1990년 봄학기 고려대 철학과 교양 선택과목인 ‘현대 철학 사상’ 강의실. 표재명 교수가 ‘실존주의’의 핵심인 개인의 고독과 진리의 주체성에 대해 역설했다. ‘유신론적 실존주의’로 불리는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어 권위자인 그는 ‘신 앞에 전적으로 책임을 지고 홀로 서 있는 존재’라는 키에르케고어의 인간관을 ‘단독자’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표 교수 자신도 ‘단독자’로서의 실존적 고독을 독실한 기독교 신앙으로 이겨냈다. 그 해 8월 약혼자와 혼인을 앞둔 작은 아들 신익 씨를 돌연사로 잃었다. 원인 규명을 위한 부검을 거절한 뒤 오랜 시간 슬픔에 빠졌지만 신앙의 힘으로 이겨냈다. 은퇴 후 명예교수로 지내던 70대 초반 파킨슨씨병을 얻었으나 역시 종교적 믿음으로 극복했다. 그러다 2016년 11월 요양병원에서 갑작스러운 폐렴을 만나 작고했다. 향년 83세였다.
1996년 학술 저서 ‘키에르케고어 연구’로 열암학술상을 수상하는 등 10여 권의 철학서를 펴냈지만 그의 인생 이야기가 책으로 출판되어 나온 것은 5주기인 2021년 11월이었다. ‘덴마크에서 날아온 엽서(드림디자인)’라는 이름의 책이다. 고인이 생전에 키에그케고어를 공부하기 위해 덴마크에 갔던 경험을 모은 글, 대학신문과 잡지, 교회 등에 기고한 글들, 그를 추모하는 지인들이 쓴 글들 등을 모아 인생 연표와 함께 엮은 책이다.
제목이 시사하는 것처럼 이 책에는 보통의 추모서적과 다른 특별한 것이 있다. 표 교수가 45세이던 1978년 7월부터 다음해 7월까지 덴마크 코펜하겐대 연구교수로 단신 부임하는 동안 부인 안준실 씨(2023년 작고)와 큰 아들 신중 씨(2019년 작고), 딸 신희 씨, 작은 아들 신익 씨(1990년 작고)에게 보낸 수백 통의 엽서 편지들이다. 책의 2장에는 모두 83편의 엽서 편지 내용이 사진과 함께 소개되어 있다. 1978년 12월 발신된 성탄절과 새해 인사의 내용은 이렇다.
“첫 사랑은 영원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린 시절 철없었던 때의 꿈이, 그리고 철들면서 품었던 삶에서의 꿈이 어떻게 저렇게 변모하면서 한 사람의 삶을 이끌고 전개시켜 나간다는 생각이. 착하고 꾿꾿하고 아름다운 꿈을 오는 성탄과 새해에 품기를 바란다. 1978.12 아빠가.”
시아버지 표재명 교수가 덴마크에서 보내온 엽서를 설명하는 박정원 교수.
40여 년 전 덴마크에서 서울로 날아온 엽서 편지가 본인 사후 5년만에 인생 기록으로 일반에 공개된 것은 며느리인 박정원 이화여대 연구교수의 힘이 컸다. 12일 이화여대 교정에서 만난 박 교수는 “결혼해서 남편이 보관하고 있던 엽서 편지를 보고 오래 전 먼 곳에서 가족을 챙기려는 한 인간으로서의 시아버지를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 엽서들 속에 들어 있던 한 가족의 삶은, 며느리로서 어쩔 수 없이 이런저런 삶의 고단함을 겪을 때마다 신기하게도 위안이 되어주고, 초연하고 객관적인 마음을 갖게 해주기도 했었다”고 회고했다.
표 교수 작고 후 남편 신중 씨와 박 교수는 5주기에 이 엽서들로 작고 아름다운 책을 내어 기념모임을 마련하자고 약속했다. 하지만 신중 씨 역시 3년 뒤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남겨진 박 교수는 시어머니와 올케 신희 씨 부부, 표 교수의 제자와 교회 지인 등의 도움으로 끝내 남편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었다.
표재명 교수의 생전 사진. 박정원 교수 제공.
딸 신희 씨가 쓴 에필로그로 끝맺는 이 책에는 한 개인의 인생 기록이 다룰 수 있는 모든 ‘장르’가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생전 본인이 쓴 글과 사진, 그와 함께 했던 가족과 지인들이 쓴 글로 서술된 표 교수의 일생은 마지막 5장, ‘표재명의 삶과 저서’라는 제목의 16쪽짜리 연표로 깔끔하게 시각화된다. 남겨진 가족이 쓴 것이므로 표 교수의 삶을 함께 했던 가족의 생각도 은연중에 드러난다. 61세(1994년)를 다룬 연표 문단 중 “아들 표신중 내외의 뒤늦은 학업과 창업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은 이후 부모에게 염려의 대상이 된다”는 표현에는 시부모에 대한 박 교수의 죄송스러움이 묻어있다.
태어나서 현재까지 나의 삶을 연표로 정리하는 것은 자서전을 쓰는 작업의 기본이기도 하다. 인생 연표를 어떻게 쓸 것인가. 내손자(내 손으로 자서전 쓰기) 클럽 5회는 이 문제를 다룰 예정이다.
myhistory@donga.com으로 본인이나 지인의 자서전과 인생 기록에 대한 이야기를 보내주세요. 검토하여 소개해 드립니다.
신석호 부국장 ky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