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한 지 엿새째인 12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 컬럼비아대에서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학생들이 모여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억압해 왔다”며 규탄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날 컬럼비아대는 각각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학생들 간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러 외부인의 출입이 금지됐다. 뉴욕=AP 뉴시스
김현수 뉴욕 특파원
《12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 카네기홀 공연장. 세인트루크 오케스트라 공연을 앞두고 클라이브 길린슨 디렉터가 단상에 올랐다. “우리는 유대인과 아랍 예술가들과 함께 일해 왔고 이들은 모두 카네기홀의 가족입니다. 우리는 하마스의 무고한 민간인 살상과 납치를 강력히 규탄합니다.” 길린슨 디렉터의 연설에 관객들은 박수를 보냈다.
12일(현지시간) 미 뉴욕 타임스스퀘어 전광판 앞 계단 주변을 뉴욕경찰(NYPD)이 바리케이드로 막고 있다. 중동전쟁 확전 우려 속에 최근 증오범죄 우려가 커져 뉴욕은 경계태세에 들어갔다. 뉴욕=김현수 특파원 kimhs@donga.com
같은 시간 미 타임스스퀘어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타임스스퀘어의 명물인 전광판 아래 빨간 계단은 뉴욕경찰(NYPD)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막아놓은 상태였다.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 전 수장 칼리드 마슈알이 다음 날인 13일을 두고 “13일의 금요일은 지하드(이슬람 성전)의 날”이라고 선언하자 NYPD 전체에 비상령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NYPD는 이날 전 근무 경찰에 제복을 입고 대기할 것을 명하는 등 경계 태세를 높였다.》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습 이후 중동전쟁은 미국에서도 여론의 중심에 섰다. 공연장, 대학, 식당은 물론이고 건물 조명으로까지 양측 중 누구 편인지를 두고 논란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오랫동안 친(親)이스라엘 진영과 친팔레스타인 진영 간 갈등의 골이 깊어져온 데다 팬데믹 이후 반(反)유대주의 정서까지 강해지며 유대계 진영의 불만이 높은 상태다. 특히 미 대학가는 학생, 대학 지도부, 기부자가 서로 의견이 엇갈려 전례 없는 마찰로 확산되고 있다.
월가 큰손들, 대학에 “기부 끊겠다”
“저는 결코 이 학생들을 고용하지 않을 겁니다. 어떻게 그렇게 비뚤어질 수 있죠?”
그리핀을 비롯해 대학에 거액을 기부해온 미 월가 인사들은 공개적으로 일부 대학 지도부와 학생들을 비난하고 있다. 발단은 하버드대 학생들이 이스라엘에 대한 하마스의 기습공격이 이뤄진 7일 첫 성명을 내면서부터다. 하버드대 팔레스타인 학생 단체 등 30여 개 단체는 “모든 폭력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이스라엘 정권에 있다”는 서한에 서명했다. 1500여 명의 목숨을 빼앗고 200여 명의 인질을 납치한 하마스의 공격을 사실상 옹호하는 주장인 데다 미 최고 명문대인 하버드대 학생 단체 명의로 나온 첫 성명이라 파장이 커졌다.
기부자들은 크게 반발했다. 유대계인 빌 애크먼 퍼싱스퀘어 회장은 “서명 학생들의 이름을 공개하라”고 주장했다. 이에 하버드대 총장을 지낸 래리 서머스 전 재무장관은 “개별 학생에 대한 마녀사냥은 옳지 않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펜실베이니아대의 내홍은 더욱 크다. 최근 이 대학의 팔레스타인 문학축제에 반유대주의 연사가 초청된 데 이어 하마스 공격에 대한 대학 측의 소극적 대처가 기름을 끼얹었다. 세계 4대 사모펀드인 아폴로 글로벌 매니지먼트 창업자이자 대학 기부자 모임의 중심인 마크 로언 최고경영자(CEO)는 총장 사임을 요구했다. 부호 가문인 존 헌츠먼 전 주러 미국대사는 더 나아가 가족 기부를 끊겠다고 밝혔다.
3대에 걸쳐 수억 달러를 기부해온 헌츠먼가는 펜실베이니아대 경영대학원(MBA) 와튼스쿨 본관 건물에 이름이 새겨져 있다. 펜실베이니아대 학보사인 ‘데일리 펜실베이니안’에 따르면 헌츠먼은 리즈 매길 총장에게 13일 이메일을 보내 “‘선택적 도덕주의’는 대학을 바닥으로 떨어뜨린다”며 기부를 중단한다고 썼다. 팔레스타인계 펜실베이니아대 학생들은 기부자들이 학생들을 협박한다며 16일 시위에 나섰다.
젊을수록 팔레스타인 지지
미 대학들은 그간 ‘흑인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BLM)’ 운동 이후 적극적으로 정치적 성명을 내 왔다. 지난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당시에도 전쟁 반대 성명을 냈다. 하지만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 이후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여 논란을 불렀다. 헌츠먼 전 대사가 ‘선택적 도덕주의’라고 비난한 이유다.국제적 사안에 대한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혀온 미 언론도 공개적 논평을 삼가는 분위기다. 미 정계 관계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는 누구도 공개적으로 발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미국에서 민감한 문제”라고 말했다.
반면 현 20대는 각자의 목소리를 내는 데 크게 주저하지 않는다. 대학 지도부의 침묵 속에 컬럼비아대, 버클리 캘리포니아대, 펜실베이니아대 곳곳에서 시위가 벌어져 상대적으로 팔레스타인계 목소리가 크게 들린다는 해석도 있다.
로이터통신과 여론조사기관 입소스가 12, 13일 이틀 동안 미국인 1003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젊을수록 이스라엘 지지 여론이 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스라엘을 지지한다는 응답률은 40세 이상에선 53%였지만, 40세 미만에선 20%에 그쳤다. CNN 조사에서도 팔레스타인에 동정을 표하는 응답률이 35세 이하에선 64%인 반면 65세 이상에선 36%에 그쳤다. 지지 성향별로는 민주당(49%)과 무당층(47%)에서 팔레스타인에 동정심을 느낀다는 응답이 절반에 가까웠다.
13일(현지시간) 미 뉴욕 맨해튼 브라이언트파크 앞 도로에서 차량들이 팔레스타인 국기를 흔들며 차량 시위에 나서고 있다. 뉴욕=김현수 특파원 kmihs@donga.com
뉴욕 식당들도 여론전 가세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지역이자 유대계 100만 명, 무슬림 70만 명이 거주하는 뉴욕시는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이 시작된 7일부터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12일 이스라엘 지지자들은 뉴욕 유엔본부 건물에 하마스가 납치한 어린이 100여 명의 사진을 띄워놓고 하마스의 잔혹성을 규탄했다. 팔레스타인 지지자들은 주로 맨해튼 타임스스퀘어, 브루클린 일대에서 시위를 하고 있다. 거리에서 팔레스타인 깃발을 흔들고 지나가는 차량도 볼 수 있다.뉴욕의 식당들도 이-팔 여론전에 가세하고 있다. 뉴욕 인기 이탈리안 레스토랑 ‘릴리아’ 등을 운영하는 그로브하우스 외식그룹은 매출의 1%를 이스라엘 지원 단체에 기부하기로 했다. 이에 한 고객이 식당 소셜미디어 계정에 ‘팔로를 끊겠다’는 반응을 보이자 “상관하지 않겠다”고 답하기도 했다.
반면 일부 팔레스타인 식당들은 이번 중동전쟁의 여파로 애꿎게 ‘별점 테러’를 당하고 있다고 토로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전통 식당 ‘아야트’ 측은 ABC 뉴스에 “식당에 한 번도 와보지 않은 듯한 사람들이 갑자기 별을 한 개만 주고 있다”면서 “우리도 다른 팔레스타인인들처럼 하마스를 지지하지 않는다”며 울상을 지었다.
13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의 랜드마크인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 이스라엘 국기 색인 파란색과 흰색 조명으로 빛나고 있다. 이스라엘을 지지한다는 취지다. 사진 출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X
김현수 뉴욕 특파원 kimh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