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단독]‘가르칠 의사’ 없어… 지역 국립대병원, 전공의 정원 자진 반납

입력 | 2023-10-19 03:00:00

[의대 정원 확대 추진]
‘의대 증원 예고편’ 전공의 조정 잡음



정부가 필수의료 공백을 막기 위해 7월부터 의대 입학 정원 확대의 ‘예고편’에 해당하는 비수도권 의대 전공의 증원 작업을 하고 있다. 16일 서울시내 한 대학 의과대학 앞을 시민들이 지나가고 있다. 뉴스1


최근 비수도권 A국립대병원은 보건복지부로부터 영상의학과 전공의(레지던트) 정원을 내년에 2배로 늘려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지역의료를 살릴 대책 중 하나였다. 하지만 A병원은 복지부가 전공의를 늘려준다고 해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영상의학과의 경우 병원 내 ‘가르치는 의사’(지도 전문의)가 전공의보다 최소 5명 더 많아야 하는데, 그만한 인력을 단기간에 구할 수 없었던 것. A병원 관계자는 “지역병원에선 ‘그만두겠다’는 의사를 말리기도 바쁜 상황”이라고 말했다.

● 비수도권 전공의 30% ‘파격’ 증원에 곳곳 파열음

정부가 ‘2025학년도부터 의대 정원을 대폭 확대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하지만 그 ‘예고편’에 해당하는 전공의 정원 조정이 곳곳에서 파열음을 내면서 의료현장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복지부는 올 1월 ‘필수의료 지원대책’에 따라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전공의 정원 비율을 현행 6 대 4에서 내년 5 대 5로 조정하는 작업을 7월부터 본격적으로 벌여 왔다. 비수도권 병원은 현재 1300여 명인 전공의 정원이 1700명 이상으로 약 30% 증가하게 된다. 앞으로 늘어날 의대 입학 정원을 지역 ‘미니 의대’에 집중 배치하겠다는 계획과 전공의 정원 조정을 연계하면 지역에서 활동하는 의사를 늘릴 수 있다는 게 정부의 시각이다. 이번 전공의 정원 조정이 의대 입학 정원 확대의 기초 작업인 셈. 의료계에선 서울에 편중된 의사 인력을 재배치하기 위해 전공의 정원을 조정하는 방향 자체는 옳다고 본다.

문제는 올해 12월 전공의 모집부터 새 기준을 적용하기 위해 속도를 내다 보니 교육 여건을 미처 갖추지 못한 병원이 속출하고 있는 점이다. 실제 필수의료 분야 전공의를 늘리고 싶어도 가르칠 교수가 부족한 병원이 많다. 18일 교육부가 국회에 제출한 국가 거점 국립대 부설 종합병원 본원과 분원 17곳의 필수의료 분야의 전임교수 재직 현황 자료에 따르면 올해 10월 기준 병원당 평균 전임교수는 응급의학과 3.5명, 흉부외과 4.1명, 산부인과 4.8명, 소아청소년과 6.7명이었다.

이 중 창원경상국립대병원의 경우 지난해 1월 1명뿐이던 응급의학과 교수가 퇴직한 후 응급의학과 전임교수가 없는 상태다. 제주대병원에 재직 중인 흉부외과 교수는 단 1명이다. 이에 의대 입학 정원을 확대해도 실습 기관인 대학병원의 교수가 부족해 충실한 교육이 이뤄지기 힘든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 수도권 외상센터 전공의는 삭감

반면 일부 병원은 ‘수도권’이란 이유로 필수의료 분야에서 활동할 전공의를 뽑지 못하게 될 위기에 처했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신현영 의원(더불어민주당)에 따르면 인천과 경기 지역의 인구 10만 명당 전공의 정원은 각각 5.0명, 4.8명으로 전국 평균(6.8명)보다 적다. 하지만 복지부의 새 방침에 따라 내년부터는 약 240명의 전공의 정원이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전국 중증외상 환자가 몰리는 경기 수원시 아주대병원은 최근 복지부로부터 정형외과 전공의 정원을 현행 4명에서 3명으로 줄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이 병원 관계자는 “지금도 이미 중증외상 환자 대비 전공의 수가 부족한데, 단순히 서울과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이를 더 줄이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번 조치가 자칫 ‘필수의료’ 분야에 대한 지원을 더 위축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한 국립대병원 심장내과 교수는 “필수의료 분야를 지망하는 의대생 상당수는 ‘인서울’ 대학병원의 교수직을 노린다. 전공의 비율 조정으로, 그 문이 좁아지면 아예 지망 과목을 바꿀 수도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의대생과 전공의를 지역에 안배하는 정책이 실제 지역의료 위기를 해소하는 효과로 이어지려면 세심한 조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역병원이 교육 여건을 갖출 수 있도록 지원하고, 수도권 소재 병원이라도 필수의료 분야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크다면 오히려 전공의 정원을 늘리는 식으로 차등 지원해야 한다는 얘기다.

18일 부산대병원 등에 대한 국회 교육위원회 국정감사에서도 의대 교수 등 인프라 확보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민주당 강득구 의원은 이날 국감에서 “현재 의대 시설, 교수 인력 등의 조건에서 정원만 늘린다고 (필수 의료 확충이라는) 목표가 달성되는지 의문”이라며 “의대 교수 등 인프라 확보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는 점에서 국립대병원장들이 의견을 모아 복지부와 교육부에 건의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에 정성운 부산대병원장은 “의료분쟁이나 의료사고 위험성이 큰 점도 필수의료 진료과목을 회피하게 되는 이유”라며 “정원을 늘려서 의사가 많이 나와도 필수의료를 담당할 의사 확보와 비례할 것 같지는 않다”고 답했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권구용 기자 9drag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