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413년 아테나이와 시라쿠사이 연합군 간에 벌어진 해전 상상도. 시켈리아를 정복하기 위해 대규모 원정에 나선 아테나이군은 시켈리아의 맹주 시라쿠사이의 방어에 막혀 고전을 면치 못했다. 결국 마지막 해전에서 아테나이 함대는 시라쿠사이 연합군에 의해 철저히 괴멸된다. 욕심에 눈이 멀어 무리한 원정을 감행한 결과였다. 사진 출처 워페어 히스토리 네트워크
정복욕에 눈먼 무리한 원정
시켈리아 원정을 주도했지만 신성모독죄로 고발당하자 적국인 스파르타로 망명해버린 아테나이 장군 알키비아데스의 흉상.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
멜로스 정복과 학살의 기억이 생생한 기원전 415년 6월, 대규모 원정이 이루어졌다. 오십노선 2척을 포함한 134척의 삼단노선, 5100명의 중무장 보병, 480명의 궁수, 700명의 투석병, 30명의 기병, 그리고 30척의 화물선이 원정에 나섰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규모의 ‘화려한 외출’이었다. 그 광경은 아마도 전장으로 떠나는 열차에 올라 영웅심에 들떠 환호하던 1차 대전 참전 병사들의 모습과 같지 않았을까? 하지만 원정은 초반부터 삐걱거렸다.
惡手가 또 다른 惡手를 불러
원정군의 공격 목표는 시켈리아의 맹주로 떠오르던 시라쿠사이였다. 전광석화 같은 급습이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원정군은 몇 달 동안 꾸물대며 시간을 허비했다. 그런 중에 지휘부에 문제가 생겼다. 전쟁에 앞장선 알키비아데스에게 소환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신성모독죄가 고발의 이유였다. 하지만 팔색조의 매력을 지닌 35세의 젊은 장군은 소환을 거부하고 배신의 길을 택했다. 그는 적국 스파르타로 망명해서 칼끝을 조국에 겨누었다. 그 결과 전쟁 지휘는 원정을 반대했던 니키아스의 손에 맡겨졌다. 전쟁의 선동자는 배신하고 전쟁의 반대자가 전투를 이끄는 셈이 된 것이다.
니키아스의 주요 전술은 성벽 공략이었다. 시라쿠사이 성벽 주변에 다시 성벽을 쌓아 도시를 포위하고 보급로를 차단하는 작전이었다. 하지만 유리해 보이던 전황은 오래가지 않았다. 펠로폰네소스 구원군이 들이닥치면서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니키아스는 해전으로 싸움의 방향을 틀었지만 승리하지 못했고 군대는 딜레마에 빠졌다. 패배냐 철수냐? 만일 아테나이 군대가 철수의 길을 택했다면 최악은 모면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몰락의 드라마에 후퇴는 없었다. 악수는 다른 악수를 부를 뿐이니까.
니키아스의 요청으로 본국에서 증원부대가 파견되었다. 2차 원정군의 위세는 시라쿠사이인들이 보기에도 놀랄 정도였지만, 증원군은 승리의 영광을 안겨준 것이 아니라 패배의 규모를 늘렸을 뿐이다. 데모스테네스가 이끄는 증원군은 야습을 감행하다가 도시 뒤편의 가파른 언덕에서 참패를 당했다. 바닷길로 탈출하려던 아테나이 군대의 절망적 시도도 시라쿠사이 해군에 저지당했다. 이어진 최후의 결전에서 아테나이 함대는 괴멸되었고 육로로 철수하던 군대 역시 곳곳에서 피습을 당했다. 대다수 병사는 살해되었고 항복한 니키아스와 데모스테네스마저 처형을 피할 수 없었다. 생포된 자들은 채석장에 갇혔다가 노예로 팔렸다. 시라쿠사이인들에게는 자비를 베풀 마음도, 이유도 없었다. 그들은 멜로스에서 아테나이인들의 행적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행한 대로 갚아주면 되는 것이 아닌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절정기의 아테나이를 몰락의 구덩이로 끌어내린 비극이었다면, 시켈리아 원정은 비극 중의 비극, 큰 비극 속 작은 비극이었다. 이 원정으로 아테나이는 거의 모든 것을 잃었다. 최종 항복(기원전 403년)까지 10년을 버틴 것이 놀라울 정도였다고 투키디데스는 말한다. 참패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군사 전략의 실패였을까? 투키디데스는 아테나이인들이 정치적 주도권을 잡기 위해 서로 음모를 꾸미느라 원정대의 효과적인 작전을 가로막고 도시를 분쟁으로 몰아넣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더 깊은 곳에 있었다. 앞뒤를 가리지 못하는 ‘탐욕과 명예욕’이었다.
인간의 ‘최선’과 ‘최악’ 보여주다
‘정치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 완전한 상태에 있을 때는 동물들 가운데 최선이지만, 법과 정의에서 멀어졌을 때는 모든 것 가운데 최악이다.” ‘최선’과 ‘최악’은 물론 상대적 개념이다. 그런 상대적인 뜻에서, 페르시아 전쟁 이후의 50년은 그리스 역사, 특히 아테나이의 역사에서 ‘최선’의 시기였다. 시민적 고양감, 지혜로운 정치가들, 공적인 정의와 개인적 자유를 존중하는 민주정 체제에서 아테나이인들은 황금기를 누렸다. 하지만 제국주의적 팽창과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인한 반전은 피할 수 없었다. 정치와 사회의 기반이 무너졌다. 대중은 방향 잃은 욕망의 노예가 되었고 정치가들은 그런 대중의 아첨꾼이 되었다. 껍데기 민주정은 다수의 폭정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스인들이 서양 역사에 남긴 유산의 위대함을 누가 부정할 수 있겠나. 하지만 고대 그리스의 역사는 성공의 기록이면서 실패의 발자취이다. 그리스의 문명과 역사를 되돌아봐야 할 가장 큰 이유가 거기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인들의 과거에서 인간이 이뤄낼 수 있는 ‘최선’과 ‘최악’,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함께 찾아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어떤 길 위에 있나.
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