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19일 자엔 윤석열 대통령이 국민의힘 당 4역과 오찬 뒤 용산어린이정원을 산책하는 사진이 실렸다. 햇살이 눈 부셨는지 윤 대통령은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고 시커먼 양복을 입은 당 대표와 원내대표, 정책위의장, 사무총장 등이 서열대로 뒤를 따르는 맥락 없는 모습이었다. 기사 제목은 ‘윤 “저와 내각 반성하겠다…국민은 늘 무조건 옳아, 민생 챙길 것”’이었지만 분위기는 달랐다. ‘침통하다…우리가 뭘 잘못했단 말인가’ 콱 막힌 울분이 압력솥 증기처럼 뿜뿜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와 윤재옥 원내대표, 이만희 신임 사무총장, 유의동 신임 정책위의장 등 `당 4역‘이 18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오찬을 한 뒤 용산 어린이정원을 산책하고 있다. 대통령실제공
혹 사진을 잘못 고른 게 아닌가 싶어 대통령실 사진 자료를 찾아봤다. 아니었다. 눈 씻고 봐도 더 나은 사진이 없을 만큼 윤 대통령은 늘 그렇듯 잔뜩 인상을 쓰고 있었고, 손짓을 하거나 말을 하는 대장 같은 모습이었다(식탁 앞에 다들 와이셔츠 차림으로 앉은 단 한 장의 사진 역시 대통령이 말하는 장면이다). 전임 정권 시절, 문재인 전 대통령이 참모진과 와이셔츠 바람으로 상큼발랄하게 청와대 경내를 산책하던 사진이 조건반사적으로 떠올라 괴롭고 슬펐다. 아 이것이 ‘윤석열 대통령실’ 수준이란 말인가.
2017년 5월 문재인 대통령이 수석비서관들과 오찬을 한 뒤 청와대 소공원을 거닐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동아일보DB
● 너무나 무능한 윤석열 대통령실
지난번 ‘도발’에서 나는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가 ‘김명수 대법원장’ 심판이라고 썼다. 윤 대통령의 김태우 특별사면은 공익제보에 대한 사법부의 (잘못된) 판단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다. 김태우의 제보 덕에 문 정권 비리가 드러난 것도 사실이다. 국힘은 당초 귀책사유가 있는 강서구청장 보선에 무공천 방침이었지만 윤심에 따라 경선의 길을 열어줬고, 결국 공천했다. 나는 이런 판단이 일리 있다고 봤으나 다수 강서구민들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윤 대통령이 오만하다며 ‘정권 심판론’에 손을 들어준 거다. 보선 패배 뒤 국힘의 첫 메시지는 “강서구민과 국민들께서 보낸 따끔한 질책을 무겁게 받아들인다”였다. 그건 됐다 치고, 국민이 궁금해하는 건 대통령 반응이다. 참모진을 통해 전달된 첫 메시지는 이랬다. “정부는 어떠한 선거 결과든지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한다.”(12일)
19일 국회에서 열린 국민의힘 최고위원회의에서 입장하는 김기현 대표 뒤로 ‘겸허한 마음’, ‘국민의 뜻’ 이 적힌 패널이 보이고 있다. 흰 박스 사진은 12일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낙선한 뒤 패배 선언을 하고 있는 김태우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후보. 김재명·박형기 기자 base@donga.com
● “안 된다” 말할 수 있는 참모 있나
물론 대통령실은 계속해서 “선거 결과에서 교훈을 찾아 차분하고 지혜롭게 변화를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다”(13일) “저와 내각이 돌이켜보고 반성하겠다”(17일) “국민은 늘 무조건 옳다. 어떤 비판에도 변명을 해선 안 된다”(18일) “나도 어려운 국민의 민생 현장을 더 파고들겠다”(19일)는 윤 대통령의 메시지를 내놨다. ‘찔끔찔끔’ 답답하다. 그래서야 라면도 매운맛 신라면, 볶음면도 화끈한 불닭면을 좋아하는 우리 국민 성정에 맞을 리 없다. 목욕탕에서도 뜨거운 물에 들어가 “시원하다”는 국민 아닌가. 더 답답한 건 가시적 조치, 즉 비서실 문책 경질 인사가 없다는 사실이다. 윤 대통령이 김태우 사면할 때, 국힘이 윤심대로 공천할 때 “안 된다”고 직언한 참모가 없었다면 문제는 심각하기 때문이다.
● “말할 용기 없으면 비서실장 관둬라.”
대통령의 참모학으로 유명한 ‘럼즈펠드 법칙’ 중 첫 번째가 “대통령에게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날카롭게 짖어댈 수’ 있어야 한다”는 거다. 미국 최연소 국방장관, 제럴드 포드 대통령의 비서실장으로 이름난 도널드 럼즈펠드(1932~2021)가 정리한 것인데 대통령에게 욕을 퍼붓는다 싶을 만큼 자유롭게 말할 용기가 없다면, 비서실장 자리를 맡지 말라고 했다. 도널드 럼즈펠드 전 미 국방장관. 동아일보DB
임명 당시 “경제 전문가이면서 정무 감각을 겸비했다”고 당선인은 설명했지만 믿기 힘들다. 윤 대통령이 경제 과외를 잘 받았는지 모르겠으나 경제 성적은 올라가지 않았다. 이번 보선 패배나 대야관계를 보면 정무 감각은 꽝이다. 올 1월엔 당 중진 나경원을 향해 “대통령께서 나 전 의원의 그간 처신을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본인이 잘 알 것”이라고, 대통령 비서가 대놓고 여당 당 대표 선거에 개입하는 전무후무한 모습까지 보였다.
● 대통령 대신 ‘대통령실’ 바꾸라는 것
대통령이 대법원장에 친구의 친구를 지명했다가 야당에 비토당했다. 그러고도 헌법재판소 소장에 대통령의 서울대 법대 79학번 동기를 또 지명하는데도 비서실장으로서 “안 된다” 소리를 한 것 같지도 않다. 날카롭게 짖어댈 용기가 있었다면 ‘대통령실 고위관계자’라는 자가 “대학 동기, 저희도 그걸 봤는데 그렇게 가까운 사이는 아닌 것 같고, 대학 동기라고 해서 불이익을 받는 것도 그렇고…” 따위의 변명은 못 했을 거다. 대통령을 충심으로 보좌하는 비서실장이라면 설령 버럭 화를 좀 듣더라도 “대학 동기라면, 진정한 친구라면, 더구나 정년이 1년밖에 안 남았으면, 이번 자리는 맡지 않는 게 좋겠다” 말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런 말 못 하는 비서실장이 계속 윤 대통령 곁에 있는다면, 대통령에게는 독이다.김대기 대통령 비서실장. 동아일보DB
국힘당 혁신보다 시급한 건 용산 혁신이었다. 이번 보선은 윤 대통령 심판이고, 윤 대통령을 바꿀 수 없으니 대통령실이라도 달라져야 한다는 거다. 선거에서 교훈을 ‘찾는다’고? 신문을 일별만 해도 단박에 안다. 윤 대통령이 변하라는 것이다. 민생 현장을 파고든다고? 당장 가시적 조치부터 하시라. 이건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이다. 적어도, 아니 죽어도, 비서실이 문 정권보다 못하단 소리를 들어서야 되겠나 말이다.
김순덕 대기자 doba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