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64명이 탄 배가 표류하다가 26명이 익사하고, 2명이 병사해 36명이 생존했다. 1653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상선 ‘스페르베르’호가 제주도 서귀포에 닿았을 때 상황이다. 생존한 헨드릭 하멜과 일행은 난파선을 탈출해 막막함과 두려움 속에 낯선 땅을 밟았을 터. 바닷길로 수만 km 떨어져 있는 섬에 표착했을 때 그곳에서 고향 사람을 만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몇 년 전 국립제주박물관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출근 첫날 전시실을 둘러보다가 인상적인 유물을 접했다. 지영록, 하멜표류기 번역본 등 표류 관련 자료가 놓여 있는 진열장이 눈에 들어왔다. 제주 해역은 조선의 선박이 자주 표류하는 시발점이며 떠돌던 외국 상선이 자주 표착하는 곳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운명이었는지 그해에 지영록 번역서 발간 업무를 맡게 됐다. 지영록 내용을 검토했더니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표류한 경위가 기록돼 있는 게 아닌가. 머나먼 이국에서 네덜란드인들이 만나는 장면은 영화를 보는 듯했다.
“중국어, 일본어 역관과 유구국(오키나와에 있던 왕국)에 표류했다가 돌아온 자와 대면케 했으나, 모두 말이 통하지 않아 사정을 물어볼 길이 없었다. 남만 서양인으로 의심이 들어 조정에 보고했더니, 오래전에 표류해 온 박연을 내려보냈다. 박연과 서양 오랭캐 3인은 장시간 자세히 살피다가 ‘나와 형제 같은 사람’이라고 말했다. 서로 이야기를 하며 슬픔에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다음 날 박연이 서양 오랑캐를 죄다 불러 각자 사는 곳의 이름을 말하게 했는데 그중 한 아이의 나이가 겨우 열세 살이고 이름이 데네이스 호베르첸이었다. 그 아이는 박연이 살던 곳과 가까운 지방 사람이었다. 박연이 자기 친족에 대해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살고 있던 집은 무너져 옛터엔 풀이 가득하고 아저씨는 돌아가셨지만, 친척은 살아 있습니다’라고 했다. 박연은 비통함을 이기지 못했다.”
하멜은 박연에게 일본으로 보내달라고 간청했다. 일본에 가면 네덜란드 상선이 반드시 정박해 있을 것이고, 그편으로 살아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하멜의 바람과는 달리 박연은 조선의 무사였다. 한양으로 올라가서 훈련도감의 포수로 들어가면 옷과 음식이 여유 있고 신변이 안전할 것이라고 말하며 한양으로 호송했다. 하멜 일행은 탈출을 여러 번 시도해 실패하다가 8명이 일본으로 도망치는 데에 성공했다. 1668년에 네덜란드로 돌아간 하멜은 그동안 받지 못한 임금을 동인도회사에 청구하며 보고서를 써냈는데 이후에 하멜표류기로 발간됐다. 조선 사회의 모습을 과장하거나 왜곡한 내용이 있으나, 그에게는 역경을 이겨낸 탈출기라 하겠다. 남아 있던 8명도 2년 후 조선 조정의 배려로 돌아갔다.
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