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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를 예술의 중심으로”… 런던에 뺏긴 ‘미술本家’ 탈환 노려[글로벌 현장을 가다]

입력 | 2023-10-25 23:39:00

19일(현지 시간) 세계적인 아트페어 ‘파리 플러스 파 아트바젤’이 열리고 있는 프랑스 파리 그랑팔레 에페메르 전시장을 가득 메운 관람객들이 그림을 감상하고 있다. 입구 바로 옆 왼쪽의 루이뷔통 전시에 특히 많은 사람이 몰렸다. 파리=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

조은아 파리 특파원


19일(현지 시간) 프랑스 파리 에펠탑 근처 그랑팔레 에페메르 전시장. 올해 2회째를 맞는 세계적 아트페어 ‘파리 플러스 파 아트바젤’(파리 플러스)이 한창이었다. 전시장 곳곳에는 관람객이 문전성시를 이뤘다. 끊임없이 몰려드는 새 관람객으로 전시품을 제대로 보려면 오가는 사람들의 어깨에 부딪히지 않게 피해야 했다.

이곳에서 만난 페이스갤러리의 크리스티아나 보일 수석 영업이사는 “파리 미술시장은 다양성이 풍부하고 생동감이 넘쳐서 많은 갤러리들이 주목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시장 정문 바로 옆에는 프랑스 명품 브랜드의 자존심 루이뷔통 부스가 자리를 잡고 많은 인파를 끌어들이고 있었다. 부스 한가운데에는 구릿빛의 거대한 루이뷔통 트렁크 모형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부스 내부 벽에는 특유의 로고와 알록달록 다양한 디자인으로 재해석된 ‘카퓌신’ 가방 25개가 걸려 화려함을 뽐냈다.

이곳을 지나던 프랑스인 예술가 자크 알베르 씨는 “루이뷔통재단 같은 민간 컬렉터가 공공 미술관을 넘어섰다”며 “이런 큰손들이 늘어나고 있어 앞으로 파리 미술시장이 더 커질 것”이라고 기대감을 나타냈다.》





“런던에 뺏긴 本家 지위 탈환”

파리 플러스의 시작은 원래 프랑스 토종 아트페어인 ‘피아크(FIAC)’였다. 세계 최대 아트페어인 ‘아트바젤’의 모기업인 스위스 MCH그룹은 지난해 피아크를 인수했다. 이후 파리 플러스로 다시 태어났다. 1970년 스위스 작은 마을 바젤에서 시작해 미국 마이애미, 홍콩 등으로 진출한 아트바젤이 파리로 무대를 넓힌 것이다.

아트바젤 앞에 굳이 ‘파리 플러스 파’가 덧붙은 점이 인상적이다. 프랑스 예술계가 토종 아트페어의 흔적을 지키려는 노력이란 얘기가 나왔다. 프랑스 갤러리들은 피아크가 사라진 것을 ‘아트페어의 뿌리를 잃었다’고 여기지 않았다. 파리 플러스를 통해 미술시장을 더 키워 세계 미술계의 중심이 되겠다는 포부를 드러내고 있다.

한 세기 전만 해도 파리는 세계 미술의 중심이자 ‘아방가르드’(전위 예술)의 발상지였다. 대표적인 경매회사인 크리스티와 소더비에서 근무했던 필립 훅은 영국 이코노미스트에 “19세기 후반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는 파리가 미술시장의 ‘스타’였다. 특히 현대 미술에선 파리가 런던보다 중요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런던은 부단한 노력으로 그런 파리의 주도권을 빼앗았다. 아트바젤과 쌍벽을 이루는 아트페어 ‘프리즈 런던’은 올해로 20년 역사를 자랑한다. 아트바젤과 UBS가 발간한 ‘미술시장보고서 2023’에 따르면 영국은 미국에 이은 세계 2위 미술시장이다. 프랑스(4위), 중국(3위) 등을 앞선다.

프랑스 예술계는 파리 플러스를 계기로 런던에 빼앗긴 세계 미술계의 본가(本家) 지위를 탈환하려는 의지를 감추지 않는다. 이코노미스트는 21일 파리 플러스에 대해 “파리가 런던의 발뒤꿈치를 따라잡으려 애쓰고 있다”며 “런던과 파리의 오랜 경쟁이 미술시장에서도 벌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파리의 ‘런던 따라잡기’ 기대감에 부응하듯 이번 파리 플러스에선 34개국 154개 갤러리가 참여했다. 주최 측에 따르면 대중에게 개방한 20~22일 사흘간 관람객만 약 3만8000명에 달했다. 미국 미술 전문지 아트뉴스페이퍼에 따르면 미 갤러리 데이비드 즈워너는 “미국 작품 수집가들이 (지난주 런던에서 열린) 프리즈 런던보다 이번 파리 플러스에 더 많았다”며 “이번 박람회에서 하루 2000만 달러(약 270억 원) 상당의 예술품이 팔렸다”고 밝혔다.



부호 투자, 브렉시트 등 호재

프랑스 미술 시장의 성장 요인으로 세계적 부호의 대규모 투자가 꼽힌다. 유명 작품들을 박물관에 전시하려면 운송비, 보험비 등이 큰 부담이다. 세계 최대 명품 기업 루이뷔통모에에네시(LVMH)의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이 설립한 루이뷔통재단은 이런 걱정 없이 박물관을 운영할 수 있다.

구찌, 발렌시아가 등이 속한 또 다른 명품 그룹 케링그룹의 설립자인 프랑수아 피노 또한 옛 증권거래소 건물을 미술관으로 탈바꿈시켰다. 카르티에재단도 현대 미술 컬렉션을 루브르 박물관 맞은편 건물로 옮길 예정이다.

프랑스 당국이 예술가들을 정책적으로 지원한다는 점도 런던과의 차이점이다. 파리는 런던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거 비용과 생활 물가가 낮은 편이기도 하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또한 프랑스 예술계에 호재로 작용하고 있다. 브렉시트 전에는 유럽 미술 수집가들이 관세 없이 런던에서 미술품을 구입할 수 있었다. 이제 비(非)EU 회원국인 영국에서 EU 회원국으로 미술품을 보내려면 작품 가격의 5~20%가 관세로 붙는다. 각종 서류 작업 등 복잡한 행정 절차 또한 거쳐야 한다.

스코틀랜드 화가 피터 도이그 씨는 이코노미스트에 “내 작품을 영국에 가져오거나 영국 밖으로 내보내는 게 매우 복잡해졌다”고 털어놨다. 이로 인해 지금은 런던에 거주하지만 파리로의 이주를 고민하는 예술가 또한 적지 않다.

다만 파리 또한 적지 않은 난관이 있다. 프랑스 정부가 예술품에 대한 면세 혜택을 조만간 종료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현재 프랑스에서 예술품을 구입하면 다른 EU 회원국보다 적은 세금을 낸다. 새 EU 지침에 따라 프랑스 또한 2025년부터 다른 EU 회원국과 비슷한 수준으로 세금을 부과해야 한다.

이에 프랑스 미술갤러리전문위원회(CPGA)는 “프랑스 미술시장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공격”이라며 반발했다. 120명이 넘는 예술가는 르몽드를 통해 ‘이 방침이 프랑스 미술 산업을 무너뜨릴 것’이라고 우려하는 서한에 서명했다.



유럽의 ‘K아트’ 열풍

19일(현지 시간) 아트페어 ‘파리 플러스 파 아트바젤’에 참여한 한국 미술전문 수장고 기업 ‘아르스헥사’의 부스. 파리=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 



이번 파리 플러스에는 한국 갤러리와 미술 관련 기업도 부스를 마련해 눈길을 끌었다. 한국 갤러리 중 유일하게 참가한 국제갤러리는 최근 타계한 박서보 화백은 물론이고 이우환, 하종현, 이기봉 화백 등의 작품을 선보였다.

파리 시민들은 특히 국내 단색화 선구자로 꼽히는 하종현 화백의 강렬함에 주목했다. ‘안개 작가’로 알려진 이기봉 화백의 작품 앞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이도 적지 않았다. 이승민 국제갤러리 홍보담당자는 “한국 문화에 대한 해외의 관심이 높다. 또 국내 중견 작가의 해외 활동이 활발해져서 해외 시장에서 국내 작가의 인지도가 올라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을 세계 미술의 허브로 키우려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미술전문 수장고 개발기업 ‘아르스헥사’는 루이뷔통은 물론이고 독일 BMW, 프랑스 화장품 브랜드 겔랑 등 세계적 기업들과 나란히 이번 파리 플러스 공식 파트너사가 됐다.

아르스헥사는 2026년 하반기(7~12월) 인천국제공항 내에 미술전문 수장고를 건설해 운영할 예정이다. 수장고를 이용할 글로벌 고객과 운영 파트너사를 찾기 위해 이번 아트페어에 진출한 것이다. 송문석 아르스헥사 회장은 “우리가 세계적인 작품들을 수장고에 잘 보존하면 한국에 수준 높은 전시를 할 수 있는 기회도 늘 것”이라며 “한국을 문화예술 허브로 키우려면 전문적인 아트 수장고 같은 기반 시설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조은아 파리 특파원 ach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