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복수, 청춘의 슬픔, 1976년. 사진: 올미아트스페이스 제공
슬픈 표정을 하고 있는 여자. 그녀의 머리카락은 실처럼 굽이치고, 입은 옷의 무늬는 마치 무언가에 베어 벌어진 상처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주변을 간질이듯 눈물처럼 흐르는 실 가닥들은 붙잡으면 허무할 지푸라기처럼 보이지만, 그럼에도 허공에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습니다. 위태로운 상황이지만 꿋꿋하게 버티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가장 힘들었던 순간의 기록
‘청춘의 슬픔’은 어떻게 40여 년 만에 이 전시장에 걸리게 된 걸까. 이번 전시 ‘자궁으로 가는 지도 - I’는 정복수 작가가 지난 3-4년간 그려온 신작을 발표하는 자리입니다. 마지막 개인전이 3년 전이었던 정복수 작가는 팬데믹을 지나며 “조용히 생각을 정리한다는 마음으로 작업을 해왔다”고 했습니다. 전시를 염두에 두면 다른 생각들이 많아지니, 그런 것들은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작업만 몰두하고 싶었다는 이야기입니다.정복수, ‘자화상-아픔의 힘’(1975) 사진: 올미아트스페이스 제공
물감을 살 돈도 부족했고 하루 한 끼로 버티면서 독학으로 그림을 그릴 때였죠.
이때 그의 나이는 스무 살이었습니다. 주변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이 무렵 화구만 챙겨 무작정 상경한 그는 흑석동 판자촌에 살게 됩니다. 어릴 적부터 함께 그림을 그려 온 친구의 배려로 마련한 거처였죠.수도를 여러 가구가 함께 사용했던 허름한 집에서 하루 종일 그림만 그리던 시절 탄생한 것이 바로 두 작품인 셈입니다. ‘청춘의 슬픔’에서 굳은 여자의 얼굴 위편엔 ‘남여 직업알선’이라는 광고가 붙어 있습니다. 광고 속엔 ‘접대부’, ‘공장부’ 같은 직업 설명이 적혀 있습니다.
사회라는 건 무엇이고 그 속에서 부속품으로 살아가는 존재들의 인간성은 무엇일지 생각하게 만드는 배치입니다. 사회 속에서 타협되고 마는 개개인의 천차만별인 맥락과 감정들도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로 느껴집니다.
달콤한 삶에 치러야 할 대가
1983년의 바닥화. ⓒ 정복수
지금은 작가들이 다양한 설치 방식을 구사하지만, 당시에는 ‘신기한 그림’으로 여겨졌다고 합니다. 지역 상인들에게 “요상한 그림이 있다더라”는 입소문이 나서 구경꾼이 몰리기도 하고, 수상한 분위기가 난다고 여긴 경찰이 전시장에 와 감시를 하고 가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이상한 그림’, ‘기괴한 그림’이라는 반응은 여전히 정복수 작품에 붙는 수식어이자, 끊임없이 이어지는 ‘오해’입니다.
정 작가가 바닥화를 그린 것은 신기함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처절한 아픔이 담긴 현실’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서양 미술의 아류가 되고 싶지 않았다”고 바닥화를 그린 이유를 설명합니다. 천장화가 신을 위한 것이라면 벽에 거는 그림은 권력자를 위한 것이기에 평범한 사람을 위한 그림으로 바닥화를 그렸다는 것입니다.
정복수, 자궁으로 가는 지도, 2022, 캔버스에 아크릴, 194 x 130.3cm. 사진: 올미아트스페이스
정복수, 자궁으로 가는 지도, 2021-2022, 캔버스에 아크릴, 130.3 x 160.2 cm
산다는 게 아름답고 좋고 달콤한 것도 많죠. 그러나 이를 위해 우리 모두는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잘린 손가락과 그림 속 몸에 새겨진 각오와 다짐들은 그런 삶의 고통, 어마어마한 대가를 담아낸 것입니다. 그 모든 과정이 자궁으로 향하는 길입니다.
고통스럽고 힘들었던 청춘을 지나 그것을 더 넓은 눈으로 담아내고 있는 것을 1970년대와 2020년대의 작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정 작가의 신선한 작품과 함께 ‘자궁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가 보세요.※ ‘영감 한 스푼’은 예술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창의성의 사례를 중심으로 미술계 전반의 소식을 소개하는 뉴스레터입니다. 매주 목요일 아침 7시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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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 기자 kim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