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길게 못 살 것 같다. 독한 글 쓰고 험한 욕 먹으면서 제 명대로 살 리 없다. 26일자 신문에다 ‘정실인사는 부패다’ 칼럼을 쓰고 나서도 나는 속이 쓰렸다. 이균용 대법원장 후보자가 알고 보면 ‘김명수가 망친 대법원’을 개혁할 적임자라는 중학교 동창 카톡을 보니 장이 더 꼬이는 듯했다(그는 같은 서울대 법대 80학번이다). 그럼 국회에서 임명동의안 부결당하지 말아야 할 게 아니냐고!
지난달 20일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증여와 관련한 국회의원 질의에 답변하는 이균용 대법원장 후보자(왼쪽). 오른쪽은 이달 12일 청와대에서 열린 행사에서 발언하는 윤석열 대통령. 동아일보DB,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왜 재산신고 누락, 부동산 보유, 증여세, 이해충돌, ‘부모 찬스’ 문제가 장관 후보자들한테서 계속 나오느냐는 야당 질의에 11일 한동훈 법무부 장관은 이렇게 답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어느 정도 성공한 사람들을 주요 보직에 쓸 때는 대개 비슷한 문제가 나오게 돼 있다”고.
● 상류층엔 그 정도 부패가 보통인가
가히 핵폭탄급이다. 털지를 않아서 그렇지, 이 정도 문제 있는 고위공무원은 수두룩하다는 얘기가 아닌가 말이다. 공직자윤리법에 따르면, 공직자윤리위원회는 고위공직자의 등록재산을 심사해야 하고 거짓 기재한 경우, 빠트리거나 잘못 기재하는 경우엔 해임까지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균용처럼 10년 이상 재산등록을 빠트리는 게 별일 아니라고?국회사무처 관계자들이 관보를 통해 공개된 공직자 재산변동사항 공개 내역을 살펴보는 모습.(2021년 사진) 동아일보DB
그러고 보면 경제 규모 세계 10위권이면서도(2022년엔 13등으로 떨어지긴 했다) 국제투명성기구(TI) 부패인식지수가 OECD 38개국 중 22등, 하위권에서 맴도는 것도 이 때문일 수 있다. 경제적 성공이 강조되는 물질주의 문화, 불평등한 사회 속에 부패가 창궐하는데 폐쇄적 사회연결망, 가족주의, 연고주의가 부패의 기회구조라는 연구 결과도 있다(신동준 국민대 교수 2023년 ‘부패의 원인에 대한 사회학적 설명’). 그러고 보니 그려지지 않는가. “우리가 남이가” 같은, ‘아는 형님’ 있어 끈끈하고 든든한, 우씨 그들끼리는 살기 좋은 더러운 세상.
● 애들 볼까 겁나는 인사청문회
한동훈 법무부장관이 이달 11일 국회에서 열린 법무부 국정감사에 출석한 모습.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법무부 인사정보관리단은 대통령실 인사기획관실에서 추천 후보를 지명하면 1차 검증 자료를 제공할 뿐이라고 했다. 이 말은 즉, 대통령실에서 ‘문제 있는 사람들’만 쓰려 한다는 얘기다. 윤 대통령이 최고의 인재들을 폭넓게, 자신이 모르는 사람이라도 찾아 쓸 생각은 않고 그저 ‘아는 사람’ 속에서만 지명하니(이것이 정실인사이고 부패의 일종이다), 또각또각 말 잘하는 한동훈이 ‘싸가지 없는’ 소리를 한 건 아닌가.
‘자녀 입시 비리·감찰 무마 의혹’으로 재판에 넘겨진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지난달 18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2심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동아일보DB
● ‘반듯한 장관감’ 폭넓게 왜 못 찾나
만일 꼭 필요한 인재인데 국민 눈높이에선 문제 있을 것 같다면, 대통령실에서 쓰기 바란다. 그리고 청문회가 TV로 생중계되는 장관 자리엔 ‘반듯한’ 인물을 앉히는 거다. 그래야 국민이 정부를 신뢰하고, 체제 정당성을 믿게 되고, 나도 성실하게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그 장관 후보자가 유능한 사람이면 더 고맙다. 공무원들은 정신을 번쩍 차릴 것이고 청년들 가치관도 달라질 것이다. 이 정부는 연고주의 아닌 능력주의라는 믿음이 생긴다면, 대통령 지지도는 자연히 올라간다. 어쩌면 우리 아이들은 북유럽 같은 부패 없는 선진국에서 살 수도 있다.(잠깐 막말을 써도 된다면, 어차피 중요한 일은 대통령실에서 그리고 대통령이 내려보낸 실세 차관이 다 하는 윤 정부다. 장관한테 힘을 실어주지도 않으면서 굳이 문제 있는 인물을 임명해 ‘보수=부패’ 이미지를 부풀린 건 없지 않은가.)
신문 칼럼 끝에 나는 ‘차라리 국민들 속 뒤집히지 않게 인사청문회를 없애는 게 낫다’고 썼다. 인사청문회를 하는 나라는 대통령제인 미국, 필리핀, 우리밖에 없다. 모처럼 전임 대통령 호소를 받아들여 사전 인사검증과 공개청문 2단계로 바꾸는 것도 방법이다. 신문 공간이 모자라 못 썼지만 사실, 내가 그 뒤에 붙이고 싶었던 문장은 이것이었다. ‘아니면 반듯하고 유능한 장관감을 갖다 앉히든지!’
김순덕 대기자 doba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