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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할뻔한 편의점, 하루 13시간 일해 버텼는데…또 겨울이 오네요”[정양환의 요즘 (젊은) 것들]

입력 | 2023-10-28 14:00:00

[11] 20대 편의점 사장 고선민 씨 (하)




“사회변화로 인한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갈등에서 기성세대가 자주 사용하는 말.”

나무위키에 실린 ‘요즘 젊은 것들’ 정의입니다. 폄하의 뉘앙스가 짙지만, 사실 다들 한때는 그런 말을 듣지 않았나요. “누구나 처음엔 어린이였지. 허나 그걸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어.”(생텍쥐페리 ‘어린 왕자’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청년들 목소리를 담아보려 합니다.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어쩌면 인생이란 타래의 실마리를 찾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살짝 여지를 남기고자 (젊은)엔 괄호를 쳤습니다. 나이가 어디쯤 와있건, 우린 모두 ‘요즘 것들’ 아닌가요.

경북 김천에서 CU김천평화주택점을 운영하는 고선민 씨는 직원을 두지 않고 친형과 교대로 매일 일하고 있다. 직장인인 형은 오후 7시부터 새벽 1시까지 근무하고, 고 씨는 오전 6시부터 오후 7시까지 13시간을 일한다. 힘겨운 나날이지만 그는 손님이 올 때마다 언제나 반갑게 웃으며 인사한다. 김천=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상편(https://www.donga.com/news/Society/article/all/20231020/121769206/1)에서 이어집니다.

경북 김천에 사는 고선민 씨는 스물다섯 살 청년이다.

고교 때부터 알바를 했던 그는 사정 상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수많은 곳에서 일해 왔다. 편의점과 마트, PC방, 호프집, 카페, 옷가게, 고깃집, 소규모 호텔, 온라인 패션쇼핑몰 등등. 하루 서너 시간씩 자고, 한 달에 한두 번 쉬며 쉼 없이 일했던 이유는 하나였다. “돈 벌기 위해.”

고 씨가 그토록 돈을 벌고 싶은 이유는 뭘까. 어리석은 질문이지만 그는 솔직했다. “이 세상은 돈이 있어야 행복하니까요.” 어릴 때부터 기초생활수급자였던 그는 스물세 살에 독립해 처음 자기 방을 가졌다고 한다. 몇 평 되지 않는 월세방에서 자신만의 목표를 세운 고 씨는 지난해 형과 함께 십년 넘게 모았던 돈을 투자해 편의점을 차렸다. “언젠가 부자가 되면 저처럼 없이 사는 사람들을 돕고 싶다”는 청년 사장의 꿈을 상편에 이어 들어봤다.

-전역 뒤 바로 편의점을 차린 건가요.
“아뇨. 1년 반 정도 뒤에요. 그 사이엔 계속 뭔가 혼자 시도해보는 시기였어요. 군대 가기 전처럼 밤낮 없이 투잡을 뛰기도 했고, 인터넷방송에 도전하기도 했어요. 잘 풀리진 않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한 계단씩 올라가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러다가 서울에서 생활할 기회가 생겨 나름 큰 결심을 하고 상경했는데 결과가 좋진 않았어요.”

-왜 서울에 갔던 건가요.
“한 온라인 패션쇼핑몰에서 뽑는 피팅 모델에 합격한 게 계기였어요. 당시에는 키 181cm에 체중 66kg로 날씬했거든요. 모델 일도 흥미로웠지만, 그걸 기회로 김천을 벗어나려는 목적이 컸어요. 그때 호프집에서 일했는데, 사장님도 좋고 근무 여건도 불만 없었어요. 근데 뭔가 갈수록 ‘정체되는’ 느낌이더라고요. 처음 독립해 월세방에 살았는데, 갈수록 친구들 공동숙소처럼 돼버렸어요. 친구들이 좋긴 하지만, 늦게 퇴근해 같이 술 마시고 늦잠 자는 생활이 반복되니까. 서울로 가서 초심도 되찾고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싶었습니다.”

고선민 씨가 서울에 있는 한 온라인 패션쇼핑몰에서 피팅 모델로 일할 당시 찍은 사진. 사진제공 고선민 씨

-서울살이는 어땠나요.
“음…,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어요. 변명 같지만, 코로나 때문에 모든 게 꼬여버렸습니다. 일단 온라인쇼핑몰에서 몇 주 만에 관뒀어요. 팬데믹 때문에 매출 떨어졌다고 모델 숫자를 확 줄이더라고요. 초보인 제가 1순위였죠. 그 뒤 구한 옷 가게 알바도 1주일 만에 관뒀어요. 역시 장사 안된다며 그만 나오라더군요. 이후 80군데 이상 알바를 지원했는데, 답도 안 해주는 경우가 많았어요. 코로나로 인원 감축하는 곳은 늘어나는데, 그렇게 일자리 잃은 인력은 넘쳐나니까요. 그땐 돈 없어서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먹질 못했어요.”

-그래서 고향에 돌아온 건가요.
“처음엔 안 오려고 했죠. 이대로 포기하긴 억울하기도 했고. 어렵사리 호텔 청소를 시작했는데, 생활비도 빠듯했어요. 김천은 월세방이 20~30만 원인데, 서울은 싼 게 60~70만 원이니까 월세 내면 남는 게 없었어요. 그래도 어떻게든 버티려 했는데, 형이 계속 내려오길 종용했어요. 사실 서울 갈 때도 엄청 말렸거든요. 연고도 없는 네가 뭘 할 수 있느냐며. 내려와서 자기랑 동업하자고 설득했어요. 두 달 만에 내려가는 게 왠지 실패자가 되는 기분이라 싫었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어요.”

-형제가 선택한 동업이 편의점이군요.
“저희가 가진 돈이 많지 않다 보니, 처음엔 치킨 가게를 떠올렸어요. 초기비용이 비교적 적게 들더라고요. 근데 닭도 튀길 줄 모르는데 무작정 덤비긴 위험하잖아요. 그래도 제가 오래 경험한 편의점이 제일 낫겠다 싶었던 거죠. 몇 달 동안 나름 시장조사와 연구를 많이 했어요. 편의점 브랜드도 다양한데다, 어디서 하느냐 등 따질 게 많으니까요.”

-제일 크게 고려한 점은 뭔가요.
“저희 형제 ‘둘이서 할 수 있느냐’였어요. 알바까지 둘 여력이 없거든요. 초기 자본금이 8000만 원 들었는데, 70% 이상은 형이 저축한 거예요. 저도 안 쓰는 편이지만, 형은 고등학생으로 PC방 알바할 때부터 한 푼도 안 쓰고 모았대요. 하지만 둘이 모은 돈 다 넣고도 대출까지 받아야 했어요. 처음부터 잘 될 거란 보장이 없는데, 일단은 둘이서 어떻게든 버텨보자고 했죠. 그래서 24시간 열지 않는다는 조건이 중요했어요. 제가 오전 6시 오픈해서 오후 7시까지 일하고, 사회복지사로 일하는 형이 퇴근해 7시부터 새벽 1시 문 닫을 때까지 있는 거죠. 지난해 8월 29일 드디어 창업했습니다.”

지난해 8월 경북 김천 CU김천평화주택점이 정식 오픈했을 당시 모습. 고선민 씨가 직접 찍은 사진이다. 어려운 여건 속에 창업한 그는 이 사진을 찍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진제공 고선민 씨

-혼자 하루 13시간씩 일하기 힘들 텐데요.
“만만치 않죠. 20대라지만 체력적으로 버거울 때도 있어요. 게다가 올해 6월까지 하루도 못 쉬었거든요. 지금은 하루씩 도와주시는 분에게 부탁해 한 달에 1번 정도 쉬어요. 그래도 제가 편의점 알바를 오래 해서, 상품 발주나 관리 등을 아니까 초기에 헤매는 일은 없었어요. 근데 일도 일이지만, 혼자서 가게를 지킨다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돈 아끼려고 유통기한 지나 처분해야 하는 편의점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다 보니 건강도 나빠지더라고요.”

-어디가 아픈 건가요.
“하하, 병 생긴 건 아니고요. 체중이 너무 불었어요. 좁은 공간에서 오래 있는 데다 열량 높은 음식을 주로 먹어서인지 88kg까지 살이 쪘어요. 이러다 큰일 나겠다 싶어서, 지금은 80kg까지 감량했는데 더 빼려고요. 편의점 창고에 아령 같은 운동기구를 갖다 놓기도 했었는데, 지금은 도로 집에 갖다 뒀어요. 공과 사는 좀 구분해야겠더라고요. 여기도 엄연히 직장인데 일에 더 집중해야겠단 마음이었어요.”

-간이침대 같은 게 없는 이유도 그래서인가요.
“네, 늘어지고 싶지 않았어요. 쉴 때도 차라리 관심 분야에 대한 공부를 하지, 허투루 시간 보내지 않으려고 해요. 예전에 알바할 때 돌이켜보면, 손님 없거나 급한 일 없으면 의미 없이 핸드폰으로 영상이나 보며 허송세월 많이 했거든요. 물론 그런 쉬는 짬도 당연히 필요하지만, 지금은 제가 사장이잖아요. 퇴근하고 집에서 쉬면 되니까, 일터에선 최선을 다하는 거죠.”

-열심히 일한 만큼 보상이 있었나요.
“참 그게…, 세상일이 맘대로 되질 않더라고요. 편의점 오픈하고 처음 몇 달 동안 장사가 너무 안돼서 망할 뻔했어요. 실제로 형이랑 폐업까지 고민했어요. 여기 김천역 인근이 옛날엔 번화가였어요. 근데 지금은 빈 상가가 여러 곳일 정도로 많이 쇠락했어요. 저희 편의점 있는 건물도 지금은 김천시 산하기관이랑 행복주택이 입주했는데, 당시엔 텅텅 비어서…. 잘 모르시겠지만, 편의점이 하루 매출 50만 원이라면 이것저것 떼면 5만 원도 안 남아요. 형제가 하루 19시간 일하는데, 버는 돈이 그마저도 안 될 때가 많았어요. 그러니 상품 폐기는 늘고 일을 하면 할수록 손해가 커지는 거예요. 정말 앞이 캄캄했어요.”

고선민 씨가 경북 김천에서 전역한 뒤 처음으로 얻은 자취방. 그가 자기만의 방을 가져본 건 이때가 처음이라고 한다. 고 씨는 여기서 다양한 목표를 세우고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 사진제공 고선민 씨

-그때 난 망해가는 편의점 사장이다 영상을 유튜브에 올린 거군요.
“네, 맞아요. 원래도 브이로그 형식의 영상은 계속 올렸는데, 창업 뒤엔 편의점에 초점을 맞춘 ‘고선몬(@goseonmon)’이란 채널을 운영하고 있어요. 말씀드렸듯, 근무 때 짬 나는 시간을 헛되이 보내고 싶지 않았거든요. 근데 그 제목이 좀 자극적이었나 봐요. 보통 편당 조회수가 1만 회를 넘지 않는데, 그건 약 10만 회가 나왔어요. 관련 쇼츠는 조회수가 94만 회나 나왔고요. 덕분에 구독자도 5000명 이상으로 늘어났는데, 잘 나가는 채널에 비하면 햇병아리지만 저한텐 너무 소중하고 감사하죠.”

-편의점 형편은 나아졌나요.
“네, 다행히 조금은요. 오픈하고 6개월가량은 정말 힘들었는데, 올해 봄부터 찔끔찔끔 매출이 올라갔어요. 지금도 잘 된다고 말할 수준은 절대 아니지만, 편의점은 확실히 여름에 매출이 증가하거든요. 이제 숨이 좀 트이고 있는데, 벌써 가을이 됐네요. 그리고 곧 겨울이 올 거고…. 이번 겨울은 지난번 같지 않아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편의점이 계절 타는지 몰랐네요.
“편의점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게 뭔 줄 아세요. 담배예요. 근데 담배는 수익이 안 돼요. 그래도 조금은 벌겠지 싶으시겠지만, 정말 손님들이 찾아오는 구인 효과 말고는 거의 남는 게 없다고 보시면 돼요. 수익 측면에서 음료수가 가장 많이 팔려야 하는데, 더운 여름엔 지나가다 편의점에서 들러 음료를 찾지만 겨울엔 잘 안 마시거든요. 그래서 군고구마 같은 걸 하기도 하는데, 저희도 겨울을 어떻게 대비할지 고민 중입니다.”

-이제 사장이 된 지 1년이 넘었습니다.
“네, 어떻게 버텼나 싶어요. 계약기간이 5년인데, 앞으로 4년 동안 더 열심히 해야죠. 솔직히 계약 종료 뒤에 편의점을 계속할지 말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무슨 일을 하더라도 한 달에 월 1000만 원 버는 사람이 되는 게 목표예요. 그래야 제 꿈을 실현할 수 있을 거 같거든요.”

이번 인터뷰는 여러모로 특별했다. 편의점 창고에 앉아 오랫동안 누군가와 얘기를 나눠본 것도 처음이지만, 고객이 올 때마다 중간에 끊어가야 하는 인터뷰도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정겨운 사투리로 “어서오세요”라 외치며 나가는 고선민 씨의 목소리를 들으면 왠지 힘이 나는 기분이 들었다. 김천=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이루고 싶은 꿈이 뭔가요.
“아직 20대다 보니 바뀌긴 하는데, 요즘 구체적인 게 하나 정해졌어요. 일단 저만의 ‘스튜디오’를 만들고 싶어요. 자신있는 요리도 선보이고, 거기서 영상 촬영해서 유튜브 등에도 올릴 수 있는. 온라인 오프라인 가리지 않고 소통하고 영업도 하는 공간으로 만들려고 해요. 장사하는 가게랑 뭐가 다르냐고 하시겠지만, 우리 지역사회에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가난한 사람도 돕고, 쇠락해가는 동네도 다시 살려 나가고 싶고. 관련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어요. 멀리 내다보고 차근차근 목표를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할 겁니다.”

-편의점 고객들에게 하고픈 말이 있을까요.
“찾아주시는 것만도 고마운데 딱히…. 아, 항상 반갑게 인사드리려 애쓰는데(실제로 인터뷰 내내 고 씨는 손님이 오면 ”안녕하세요“라며 달려 나갔다.), 혹시 맘에 안 드시는 게 있으면 편하게 얘기해주세요. 음…, 좀 다른 얘기지만 하나만 조심스레 말씀드려도 되나요. 편의점에 가시면 가끔 직원들이 너무 무표정하거나 딱딱하다고 느끼실 때가 있을 거예요. 제가 세상의 모든 편의점을 대변할 순 없지만, 그런 분들은 대부분 사람한테 크게 ‘데인’ 적이 있는 거예요. 요즘은 손님들도 대체로 점잖고 좋으시지만, 가끔 마음의 상처를 입는 일이 벌어지거든요. 혹시 그런 직원을 보시더라도 너그럽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전 지금처럼, 아니 앞으로 더 열심히 살겠습니다. 편의점 파이팅!”

[※고선민 씨에게 양해를 구할 게 있다. 그는 인터뷰에서 편의점 운영 중 겪은 힘들었던 일들을 가감 없이 들려줬다. 그 중엔 경찰이 출동할 정도로 가볍지 않은 사건도 있었다. 기사로 써도 좋단 허락을 받았지만, 고민 끝에 관련 내용들은 다루지 않기로 했다. 그런 사례들이 편의점 종사자들의 고충을 잘 보여줄 순 있겠지만, 행여 누군가는 앙심을 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 무엇보다 고 씨를 포함해 편의점에서 일하는 모든 이들의 안전이 가장 소중하니까. 아울러 독자들에게도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나의 옛날이야기] ‘요즘 (젊은) 것들’은  연재 글마다 청년들이 직접 고른 옛 사진들을 싣고자 합니다. 자신의 얘기를 들려주며 그 시절을 들춰보는 ‘코너 속의 코너’입니다. 고선민 씨가 보내준 두 번째 사진은 지난해 편의점 개업을 앞두고 서울 본사에서 교육받을 때 찍은 것이라고 합니다. 솔직히 그리 잘 찍은 사진은 아니지만, 높다란 창을 뚫고 들어오는 햇살이 그의 밝은 미래를 비춰주길 바라는 뜻에서 게재했습니다. 사진제공 고선민 씨


김천=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