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질, 시가전 피해, 아랍권 여론, 헤즈볼라 참전 등 변수 미국, 이스라엘 편이지만 ‘인질 안전’에 우선 순위
멀게 느껴지지만 우리와 뗄 수 없는 중동. 그 생생한 현장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정치, 경제, 자원, 종교, 역사, 문화가 얽혀 있는 갈등과 변화의 ‘핫스팟’ 중동의 모습을 쉽고, 재미있게 또 인사이트를 담아 알려 드리겠습니다.
카이로특파원, 국제부 차장, 카타르의 싱크탱크 아랍조사정책연구원(ACRPS) 방문연구원으로 활동하며 중동을 취재했습니다. 단행본 <중동 라이벌리즘>과 <있는 그대로 카타르>를 펴냈습니다.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의 근거지인 가자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격이 거세지고 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27일(현지 시간) “전쟁이 2단계에 돌입했다”고 밝혔다. 같은 날 다니엘 하가리 이스라엘군 대변인도 “군대(이스라엘군)가 그 땅(가자지구 북부)에 주둔 중이고 전쟁을 이어가고 있다”고 있다고 말했다.
이스라엘군은 26일(현지 시간) X(옛 트위터)를 통해 전날 하마스의 근거지인 가자지구에서 탱크, 보병부대 등을 투입해 지상작전을 수행하는 모습을 공개했다. 이스라엘은 23일부터 가자지구 안으로 지상군을 투입해 작전을 진행 중이다. 이스라엘군 X(옛 트위터) 영상 캡처
이스라엘은 25일부터 매일 가자지구로 지상군을 투입했다. 현지 언론과 외신들에 따르면 공격 범위가 넓어지고 강도도 높아지고 있다. 그리고 이제 가자지구에 주둔하며 지상전이 확대되고 있다.
다만, 이스라엘은 아직 ‘전면전’이란 표현은 안 쓴다.
이제 가자지구 안팎에서는 전면적인 지상전이 벌어지는 시점이 언제일지에 주목하고 있다. 또 이스라엘이 1400여 명이나 자국민이 사망한 이번 전쟁에서 지상전을 16일 뒤에나 시작했고, 여전히 ‘전면적 지상전 개시’는 선언하지 않는 배경에도 관심이 모아진다.
이스라엘의 핵심 우방국이며 동시에 이번 전쟁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 의사를 밝혀온 미국이 여러 경로를 통해 ‘안전한 인질 석방’을 가장 중요한 사항으로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25일 ‘인질 석방을 위해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에게 지상전 연기를 요청했느냐’는 질문에 “아니다”라고 답했다. 하지만 곧바로 “사람들을 안전하게 구출할 수 있다면 그것이 그가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전략소통조정관은 “국지적인 임시 휴전이 가자에서 인질들을 석방하는 데 필요하다면 이를 지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스라엘 경제 중심지인 텔아비브에서 한 여성과 어린이가 거리 벽에 붙은 하마스에 억류됐거나 가자지구에서 실종된 이스라엘인들의 사진을 만지고 있다. 텔아비브=AP 뉴시스
사실상 미국은 지상전을 통한 하마스 궤멸보다 인질 석방을 우선 순위에 두고 있는 것이다. 하마스에 대한 즉각적이고 치명적인 보복도 중요하지만 이스라엘로서는 세계 최강국으로 중동에 대규모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는 미국의 메시지도 무시할 수 없다.
27일에는 미국이 이스라엘에 대규모 지상전을 재고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워싱턴포스트(WP)는 미국 정부가 대규모 지상전 대신 항공기, 특수부대 등을 이용한 정밀타격형 공격을 통해 하마스를 공격할 것을 이스라엘에 요청하고 있다고 전했다.
당장 하마스에 억류돼 있는 220여 명의 인질 중 미국 국적자는 12명인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인 인질의 안전에 문제가 생기면 그 비난은 당연히 바이든 행정부로 집중될 수밖에 없다.
이라크, 시리아, 카타르, 바레인 등에 주둔 중인 미군의 안전도 역시 중요한 문제다. 중동 주둔 미군은 이란군 또는 친이란 무장단체의 공격 대상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라크와 시리아에 주둔 중인 미군은 이번 사태로 인해 집중 공격 대상이 될 수 있다. 하마스의 후원자이며 40년 넘게 반미 기조를 이어온 이란은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두 나라에는 이란의 지원을 받는 시아파(이란은 이슬람 시아파의 종주국) 무장단체들이 대거 활동 중이다. 시리아에선 이란 혁명수비대가 직접 군사 작전도 진행한다.
실제로 최근 이라크와 시리아에선 친이란 무장단체의 현지 주둔 미군을 겨냥한 공격이 여러 차례 있었다. 이 과정에서 미군 20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또 미국은 이에 대한 보복 차원에서 27일 시리아의 이란 혁명수비대 관련 시설 2곳을 공격했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 전쟁은 이스라엘의 우방인 미국에게도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특히 시리아와 이라크에 주둔 중인 미군은 친이란 무장단체의 공격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IRNA 홈페이지 캡처
성일광 고려대 중동‧이슬람센터 정치경제연구실장은 “미국의 이스라엘 지지는 분명하지만 이번 사태로 인해 인질이든 군인이든 자국민이 희생되는 건 큰 부담”이라며 “특히 바이든 대통령은 대선이 1년 밖에 안 남은 상황이라 더욱 여론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동안 바이든 대통령은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 간 외교 정상화 추진을 포함해 중동 정세를 안정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이번 하마스와 이스라엘 간 전쟁만으로도 내년 대선에 심각한 악재다. 미국인 사상자 발생과 중동 정세가 더 혼란스러워지는 건 바이든 대통령으로선 어떻게 해서든 피해야 하는 추가 악재다.
하지만 가자지구에서 전면전이 벌어질 경우 ‘끔찍한 시가전’과 ‘대규모 민간인 피해’는 피할 수 없다. 하마스 보건부에 따르면 이미 이번 전쟁으로 가자지구에선 6747명(26일 기준)이 숨졌다.
무엇보다 가자지구는 인구 밀도가 높기로 유명한 지역이다. 건물들은 촘촘하게 들어서 있고, 지하에는 480km 길이의 땅굴이 조성돼 있다.
아무리 이스라엘군이 세계 정상급의 역량을 갖춘 군대라고 해도 이런 지역에서 전면적인 지상전이 펼쳐진다면 대규모 사상자 발생은 피하기 어렵다. 미국도 과거 이라크 전쟁에서 대규모 시가전이 펼쳐졌던 ‘팔루자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다. 특히 팔루자와 달리 가자지구에서의 지상전은 지하 땅굴에서도 대규모 전투가 벌어질 것이기 때문에 이스라엘군의 피해는 예상보다 훨씬 더 커질 수 있다.
하마스의 ‘인간 방패 전략’과 이스라엘군의 대규모 공격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민간인 피해 역시 커질 수밖에 없다. 사실상 민간인과 하마스 대원을 구별하는 게 어려운 상황에서 여성과 어린이 사상자가 늘어나면 아랍권은 물론이고 국제사회 전체적으로도 반이스라엘 여론이 빠르고 강하게 형성될 가능성이 높다.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전면적인 지상전을 개시할 경우 팔레스타인 민간인 피해도 크게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아랍권은 물론이고 국제사회 전체적으로도 이스라엘에 대한 여론이 악화될 수 있다. 22일 시민단체들과 한국에 거주 중이 아랍인들이 서울 종로구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 인근에서 이스라엘에 팔레스타인 공격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동아일보 DB
팔레스타인 민간인 피해가 늘어나는 것은 2020년 8월 ‘아브라함 협정(이스라엘과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간의 외교 관계 정상화)’을 계기로 모멘텀이 만들어진 이스라엘과 아랍권의 해빙 무드가 깨지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리 과거와 달라졌다고 해도 여전히 이스라엘은 아랍권에선 ‘적’이란 인식이 강하다.
카타르의 싱크탱크인 아랍조사정책연구원(Arab Center for Research and Policy Studies·ACRPS)이 지난해 아랍권 14개 나라에서 3만33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84%가 ‘이스라엘과의 수교를 반대한다’고 답했다. 찬성은 8%에 그쳤다. 또 76%가 ‘팔레스타인 문제는 아랍 전체의 문제다’라고 답했다.
2020년 8월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 대통령의 중재 아래 이스라엘과 아랍에미리트(UAE), 바레인이 ‘아브라함 협정’을 맺고 외교 정상화에 합의했다. 이를 계기로 이스라엘과 아랍권에는 해빙 분위기가 조성됐다. 하지만 가자지구에서 전면전이 벌어지고 팔레스타인 민간인 피해가 커지면 아랍권과 이스라엘 간 관계 개선은 다시 어려워질 가능성이 높다. 트럼프 화이트하우스 아카이브
이번 하마스의 대규모 공격은 이스라엘과 아랍권의 화해 분위기를 파괴하려는 게 가장 큰 목적이었다. 이스라엘로서는 팔레스타인 민간인 피해가 늘어나고, 이로 인해 아랍권의 반이스라엘 정서가 강해지는 것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이를 무시한다는 건, 하마스가 파놓은 함정에 그대로 빠지는 꼴이다.
이스마일 하니예를 비롯한 하마스의 최고 지휘부가 이미 카타르로 피신해 있다는 점도 이스라엘로서는 부담이다. 하마스 궤멸에 필요한 최고 지휘부 제거가 가자지구에서의 전면적인 지상전으로는 이미 달성할 수 없는 목표가 됐기 때문이다.
하마스와는 차원이 다른 무장정파인 헤즈볼라가 본격적으로 참전할 경우 이스라엘로서는 서부(하마스)와 북부(헤즈볼라)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
헤즈볼라는 하마스보다 훨씬 더 체계적이고, 파격적인 이란의 지원을 받아왔다. 이미 20만여 기의 로켓과 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레바논 남부를 중심으로 활동 중인 친이란 시아파 무장정파인 헤즈볼라는 이란이 지원하는 무장정파 중 가장 막강한 영향력과 전투력을 자랑한다. 이스라엘군 홈페이지 캡처
특히 헤즈볼라는 시리아 내전, 이슬람국가(IS) 퇴치 작전 등에서 이란 혁명수비대의 최고 정예부대인 ‘쿠드스군’과 공동으로 작전을 수행한 적도 많다. 그만큼 제대로된 실전 경험도 풍부하다는 뜻이다. 쿠드스는 아랍어로 예루살렘을 의미한다. 이란은 이스라엘로부터 예루살렘을 탈환한다는 뜻에서 해외작전과 특수작전을 수행하는 최정예 자국 군대의 명칭을 쿠드스군으로 정했다.
헤즈볼라는 2006년 34일간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이며, 이스라엘을 곤혹스럽게 만든 경험도 있다. 당시 100명 이상의 이스라엘군이 사망했다. 또 이스라엘은 ‘헤즈볼라를 궤멸시키겠다’고 강조했지만 실패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레바논에서는 1000여 명의 민간인 사망자가 발생했다. 당연히 국제사회에서 이스라엘은 큰 비난을 받았다.
사우디 싱크탱크인 킹파이잘 이슬람연구센터의 조셉 케시시안 수석연구위원은 “이스라엘이 전면적인 지상전에 못 나서는 큰 이유 중 하나는 헤즈볼라의 참전 가능성 때문”이라며 “헤즈볼라가 정식으로 참전할 경우 미국의 지원이 있더라도 이스라엘로서는 큰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많은 중동 전문가들은 ‘현실적으로 전면전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고 답한다. ‘이스라엘판 9‧11 테러’로 불릴 만큼 피해가 큰 상황에서 이스라엘로서는 하마스의 본거지인 가자지구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진행해야만 하는 상황이라는 것. 30만여 명의 군대를 가자지구 인근에 집결시켜 놓았다는 것만으로도 가자지구에서의 전면적인 지상전에 대한 이스라엘의 의지를 엿볼 수 있다.
다만, 가자지구를 이스라엘이 완전히 장악한다고 해도 하마스를 완전히 제거하겠다는 목표 달성이 가능할지에 대해선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가 많다. 가자지구를 장악하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예측이 어렵다.
가자지구에서의 전면적인 지상전이 펼쳐지고 헤즈볼라, 나아가 이란의 직접적인 참전과 미국의 군사 조치까지 이어질 경우 중동 정세는 다시 한번 크게 요동칠 것이다.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은 29일 소셜미디어 X(옛 트위터)를 통해 “미국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압박하지만 그들은 계속 이스라엘에 광범위한 지원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호세인 아미르압돌라히안 이란 외교장관도 27일 블룸버그TV에 “미국이 지금처럼 계속 행동한다면 미국에 대항하는 새로운 전선이 형성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세계가 가자지구를 불안한 눈으로 예의주시하는 상황도 당분간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세형 기자‧전 카이로 특파원 turt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