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튀어나오는 두더지 때리듯이 물가를 잡고 있다.” “추경호 경제부총리가 요즘 물가과 사무관 같다.”
윤석열 대통령이 민생을 강조하는 메시지를 내놓고 지난 21일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 순방에 나선 직후부터 관가에서는 전방위적인 물가 방어전이 펼쳐졌습니다. 자연스레 관가 안팎에서는 정부의 물가 대응을 놓고 이런저런 말들이 오갔는데요.
편안한 민생에 필요한 것이 물가 안정만은 아니겠습니만, 어쨌든 한국 정부는 물가에 있어서만큼은 과거부터 ‘진심’이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입니다. 물가가 서민 생활에 부담을 주고 있다는 판단이 내려지는 순간 가차 없이 행동에 나섰다는 것인데요.
쉽게 말하면 물가에서는 옆 가게에서 가격을 올리면 주변 가게도 따라서 가격을 올리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 있기 때문에 위험 요소가 보이는 지점을 적극적으로 관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 국무총리부터 부처 실장들까지… 현장에서 물가잡기
최근 물가 방어전의 하이라이트를 꼽아보자면 윤 대통령 순방 기간이던 24일이겠습니다. 순방에 동행하지 않은 주요 관료 상당수가 현장을 찾아 물가 행보를 보였는데요.
우선, 한덕수 국무총리가 이날 서울 마포농수산물시장을 찾아 김장철을 앞두고 배추 등 식료품 물가 점검에 나섰습니다. 이영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은 서울 동작구 노량진수산시장을 방문했고 기획재정부에서는 순방에 동행한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대신 김병환 1차관이 도봉구의 하나로마트를 찾았습니다. 산업통상자원부에서도 강경성 2차관이 범정부 석유시장 점검단 운영 계획을 논의하는 회의를 열었습니다.
한덕수 국무총리가 24일 오후 서울 마포구 마포농수산물시장을 방문해 쪽파와 갓을 살펴보고 있다. 총리실 사진 공동취재단
정부의 물가 대책을 놓고 ‘두더지잡기’ 얘기가 나오는 이유는 이날 농림축산식품부의 움직임을 보면 잘 알 수 있는데요.
CJ제일제당 인천1공장을 방문한 농식품부 권재한 농협혁신정책실장은 “제당 업계가 내년 초까지 가격 인상을 최대한 자제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최근 세계적인 원당 가격 인상으로 ‘슈거플레이션(설탕+인플레이션)’ 우려가 제기되는 상황에서 국내 대표 설탕 기업을 찾아 당분간 가격 인상이 없다는 메시지를 내놓은 것이죠.
같은 날 농식품부에서는 박수진 식량정책실장도 경기 평택시에 있는 계란유통센터를 방문해 장바구니 물가 부담 완화를 당부했는데요. 역시나 꿈틀거리는 계란 가격 동향에 따른 행보였습니다.
농식품부에서는 다음날 권 실장이 이마트 세종점을 찾은데 이어 26일에도 한훈 차관이 소비자·외식 7개 단체장과 만나 물가안정 간담회를 열고 가격 인상 요인을 외식업계에서 최대한 흡수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 물가 사령탑은 기재부…채소·과일은 비축·계약 물량 등 활용
최근의 인플레이션은 사실 세계적인 현상인데요. 코로나19 사태 속에 풀린 막대한 유동성에 세계적인 공급망 재편, 높아진 석유·가스 등 에너지 가격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물가를 잡아야 하는 힘든 과제를 풀어야 하는 현장 사령탑은 기재부라고 할 수 있는데요. 기재부에서는 핵심 부서로 꼽히는 경제정책국 안에 물가정책과가 있습니다.
기재부 조직도에 명기된 물가정책과의 업무 영역을 살펴보면 ‘물가 동향 및 공공요금 관리’ ‘물가 대응’ ‘물가 대책’ ‘물가분석’ ‘농축수산물 물가 총괄’ ‘원자재·농산물 일일동향’ 등입니다. 농축수산물과 원자재 가격을 포함한 물가 관련 동향 전반을 살펴보면서 물가에 대응하고 물가 관리를 위해 전기와 가스를 포함한 공공요금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 발병 가능성이 높은 겨울철을 앞두고 계란 가격이 평년보다 21% 올랐다. 뉴시스
물가정책과는 정부 부처 중에 일 많기로 소문난 기재부 내에서도 격무로 유명합니다. 아무래도 업무 영역이 광범위할 수 밖에 없다는 점이 크겠습니다. 가을철인 최근 소비자 물가에서는 유독 채소류와 과일류의 가격이 높게 나타나는 모습인데요. 물가정책과에서는 왜 이런 것인지를 분석해서 구조적인 요인인지, 계절적인 요인인지를 판단하고 적절한 대응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러다보니 최근 물가정책과에서는 경제 정책과는 큰 관련이 없어보이는 이상기후까지도 고민하는 모습입니다. 과일 대표 품목인 사과의 경우 올 봄에 있었던 이상기온이 사과 작황에 악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가공식품 소비 대신 소비자가 직접 구입하는 ‘상품(上品)’ 사과의 작황이 나쁘다는 내용까지 파악해야 하는 식입니다.
재배 기간이 한달 반에 두 달 정도 길지 않은 채소류의 경우에는 무더운 여름이 지난 가을에 가격이 오르는 경향이 있는데 올 여름에는 폭염과 집중호우로 상황이 더 나빠진 것으로 보고 있는데요. 과일과 채소 등은 정부가 관리하는 비축, 계약 물량으로 수급을 조절하고 관세를 조정해 수입 물량을 조이고 푸는 방식으로 물가 조절에 나서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부가 김장철을 앞두고 배추 수급 불안정 우려를 해결하고자 가용물량 2천900t을 방출한다. 또한 김장 부재료 중에서도 생강·대파 등 가격상승 정도가 크고 소비가 많은 품목은 납품단가 지원을 통해 가격안정을 유도한다.23일 서울 시내 한 대형마트에 한 시민이 배추를 구매하고 있다. 2023.10.23 뉴스1
● 통제 못하는 국제유가… 유류세로 가격 조절
물가정책과의 업무 중에는 ‘국제유가’도 있는데요. 산유국이 아닌 한국의 정부가 국제유가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야 없을테고 국제유가에 따른 물가 영향을 분석하고 대응하는 역할이겠습니다. 기름값은 직접적인 휘발유, 경유 가격은 물론이고 물가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가운데 정부의 물가 관리 노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유류세 인하 조치인데요. 2021년 11월에 시작된 유류세 인하는 올 연말까지 계속 이어질 예정입니다. 심각한 세수 감소 속에 8월 말 종료 예정이던 인하 조치를 10월 말로 2개월 연장한데 이어 연말까지 추가로 연장한 것입니다.
17일 영동고속도로 여주휴게소 주유소에서 시민들이 주유를 하고 있다. 뉴스1
유류세를 이렇게 찔끔찔끔 연장하는 모양새가 썩 폼이 나지 않는다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국제유가가 좀 내려오면 유류세 인하 조치를 마무리 짓고 세수 확보에 나서려던 기재부의 계획을 여전히 불안정한 국제유가가 발목을 잡고 있는 셈인데요. 세수도 중요하지만 물가가 무엇보다 중요한 정부의 스탠스임을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 “물가는 연쇄 작용… 도미노 막으며 에너지·농산물 가격 안정 기다려야”
해외에서는 물가 관리를 정부보다는 중앙은행의 역할로 보는 경우도 많습니다. 중앙은행 고유의 역할이 물가안정일뿐더러 시장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민간의 가격을 정부가 관리 혹은 통제할 수 있는 뾰족한 수단이 없다는 인식 때문이기도 한데요.
반면 한국에서는 정부가 물가 관리에 큰 힘을 쏟는 가운데 최근 추경호 부총리를 놓고 세종시 관가에서 ‘물가과 사무관’ 같다는 얘기도 들립니다. 기재부 출신이면서 재선 국회의원인 추 부총리는 직원들을 적절하게 믿고 맡기면서 까다로운 국회 대응은 본인이 직접 나서는 리더십으로 내부 평가가 좋은 편인데요. 그럼에도 물가에 있어서만큼은 구체적인 품목까지 언급할 정도로 관심이 상당하다는 얘기겠습니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1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물가안정 관계부처 회의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뉴시스
윤 대통령의 메시지에 이어 국무총리와 부총리까지 직접 나서는 물가 방어전이 이어지면 민간에서는 자연스레 ‘가격 통제 아니냐’는 볼멘소리가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또 정부의 ‘자제’ 당부에도 불구하고 최근 주요 업체가 맥주 가격 인상에 나서고 외식업계에서도 잇따라 가격을 올리는 상황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두더지잡기’나 ‘가격 통제’라는 비판을 받으면서, 실제 가격 인상을 다 막아내지도 못하는 상황이지만 정부는 당분간 현장 물가 행보를 계속 이어갈 것으로 보이는데요. 기재부에서는 이같은 노력의 가장 큰 이유로 “물가는 상호 연쇄적으로 상승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꼽고 있습니다.
원자재와 인건비, 에너지 등 여러 영역에서 물가 상승 압력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특정 생산자가 가격을 올리면 이를 감안 혹은 반영해서 다른 생산자도 가격 인상에 나서는 도미노 현상이 벌어질 수 있고 그 결과로 물가 레벨이 크게 올라갈 우려가 있다는 것인데요.
이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도록 서로 가격 인상을 자제하는 상황을 최대한 유지하다보면 에너지나 농산물처럼 싸이클이 있는 품목의 가격이 다소 진정되면서 물가 상승 압력이 낮아질 수 있다는 기대감이겠습니다.
이런 노력 덕택인지, 최근 국제통화기금(IMF)은 코로나19 사태 진정 이후 한국의 물가상승률(2021년 12월 대비 올 9월 물가지표)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4개국 가운데 4번째로 낮은 증가폭을 보이며 선방했다고 평가했는데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최근 국내에서도 예년보다 훨씬 높은 물가상승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은 변함이 없습니다. 내년 4월에 있을 총선까지 감안하면 정부는 물론 정치권에서도 민생과 물가가 중요한 화두일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정부의 물가 방어전은 앞으로 어떤 양상을 보이게 될까요.
올해 남은 기간에도 정부 앞에는 전기와 가스 요금 추가 인상 등의 굵직한 과제가 놓여 있습니다.
세종=김도형 기자 dod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