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운 경제부 차장
“네가 정말 애국자다.”
2년여 전 늦둥이 셋째를 보고 주변에서 지겹도록 들은 말이다. 선의(善意)로 건넨 말이지만 듣는 입장에선 좀 의아했다. 개인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삶의 한 과정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이나 군부 독재시절 민주화 운동에나 어울릴 법한 ‘애국’이라는 단어와 등치될 수 있다는 것이 희한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2020년대를 사는 한국인에게 출산과 육아는 애국에 비견될 정도로 비장하고 지난(至難)한 것인가.
그런데 요즘 아이 셋을 키우면서 지인들의 출산 인사에 깔린 무게감이 점차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고물가, 고금리와 겹쳐 고등학생 첫째와 초등학생 둘째 아이의 학원비만 월급의 30%를 넘는다. 기자는 대입을 준비하는 첫째에게 서울 강북 일반고 재학생 평균 수준의 학원비만 지출하고 있다. 과외는 언감생심이다. 얼마 전 자사고에 다니는 아이를 둔 친구가 방학마다 학원비로만 월 500만 원가량을 쓴다는 말을 듣고 놀랐다. 그러곤 몇 해 전 자녀 교육을 위해 해외 격오지 근무를 고민한 지인 이야기가 떠올랐다. 과거 중동 오일머니를 벌러 바다를 건넌 산업역군(産業役軍)이 출산역군(出産役軍)으로 화(化)하는 순간이었다.
원인은 저출산 고령화와 생산성 저하다. 사실 이 두 요소는 별개가 아니라 서로 맞물려 있다. 교육개혁, 노동개혁 등 생산성 제고 노력이 결실을 맺지 못하면 결국 고착화된 저출산 구조를 깰 수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막대한 사교육 비용을 줄이고 인공지능(AI) 시대로의 산업구조 변화에 적합한 인재를 양성할 수 있는 교육개혁이 이뤄지지 않으면 생산성과 경제 성장률을 높일 수 없다. 혹자는 이민 확대를 대안으로 제시하지만, 프랑스의 이민자 폭동 같은 부작용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생산성을 높이고 저출산 구조를 타파할 수 있는 각종 구조개혁이 확실한 답안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좋은 약이 입에 쓰듯, 개혁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는 점이다. 기존 사회 구조에서 이득을 얻는 기득권 집단의 저항이 대표적이다. 개혁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를 바탕으로 정치권이 이익집단을 꾸준히 설득하는 정공법 외에는 방법이 없다.
최근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기자간담회에서 “어떻게 하면 저성장을 탈출하는지는 다 안다. 다만 못 하는 건 사안마다 이해 당사자가 달라서”라며 “구조개혁을 하면 잠재성장률은 2% 이상으로 올라간다. 선택은 정치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부는 3대 개혁 중 하나로 추진 중인 연금개혁안을 내놓으며 보험료율조차 적시하지 못해 ‘맹탕’ 비판을 자초하고 있다. 백년지대계인 연금개혁을 내년 총선과 결부시킨 것이라면 이전 정부처럼 포퓰리즘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원격의료, 의대 정원 확대, 국민연금 등 산적한 구조개혁을 좌고우면하지 말고 강단 있게 추진할 수 있는 정치 리더십이 절실하다.
김상운 경제부 차장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