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범 작가·프랑스 파리 거주
파리에 살면서 아직도 적응 안 되는 것이 여기의 겨울 날씨다. 온 세상이 하얗도록 함박눈이라도 기대했던 첫해의 타향살이부터 매일 부슬비가 추적추적 내리더니 지금까지 한결같이 겨울비가 내리는 파리의 음습한 겨울을 스무 해 넘게 맞고 있다. 아마 프랑스에서 한 해라도 겨울을 난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나처럼 ‘멜랑콜리’(프랑스어로 우울을 뜻함)한 겨울을 보냈을 것이 분명하다.
내게는 파리의 겨울을 견뎌내는 노하우가 있다. 특별한 목적 없이 걷는 ‘산책자’가 되어 파리의 골목골목을 발길 닿는 대로 2∼3시간 걷는 것이다. 그러다 출출해지면 허름한 가정식을 내놓는 비스트로에 들러 따끈한 양파 수프(사진)로 추위와 허기를 달래는 찰나를 맞을 때 행복함을 느낀다.
몇 해 전에는 양파 수프에 빠져 일주일에 2, 3번 즐길 때도 있었는데, 집에서 해 먹고 싶다는 욕심이 들어 단골 프랑스 레스토랑 주인에게 요리법을 배우기도 했다. 간단히 설명하면 양파 껍질을 까서 잘게 채 썰어 준비하고 프라이팬에 버터를 넣고 센 불에서 쉬지 않고 7∼8분을 볶아 준다. 그러면 양파색이 진한 갈색으로 변하고 30분 정도 뒤적거리며 양파를 캐러멜라이징해 준다. 그 다음 물을 넣고, 닭고기 육수를 넣고 모자라는 간을 소금으로 맞춘다. 수프볼에 국물을 넣고 얇게 썬 캉파뉴 빵을 잘라 담은 후 그뤼예르 치즈를 갈아 소복이 올려 200도로 예열된 오븐에 넣어 치즈가 녹을 정도로 구워 주면 맛있는 양파 수프가 완성된다. 양파 수프의 핵심은 양파를 충분히 캐러멜라이징하기 위해 계속 저어야 하는 수고다. 조리 시간이 1시간 가까이 필요하다 보니 결국 집에서 만드는 것을 포기하고 가까운 비스트로에 가서 사 먹게 되었지만 즐거운 경험이었다.
관광객들의 주머니를 호시탐탐 노리는 샹젤리제나 오페라 거리 대로변에서 양파 수프를 즐기는 것은 실패하기 십상이다. 충분히 조리하지 않고 대충 끓인 맹탕의 양파 수프를 내놓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시간을 들여 준비한 것과 아닌 것은 분명 맛에서 차이가 난다. 우리네 인생도 양파 수프도 마찬가지로 시간을 두고 뭉근히 익어가는 지난한 시간을 견뎌내야 좋은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 그러니 프랑스 레스토랑에 들러 음식을 주문한 다음 부디 재촉하지 말자. 프랑스 사람들처럼 기다리는 사이 와인 한 잔을 마시며 책을 읽거나 동행한 사람들과 이야기꽃을 피우는 동안 서비스되는 양파 수프가 어쩌면 인생의 솔 푸드가 될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정기범 작가·프랑스 파리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