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가 큰 금발의 남자는 멀리에서도 잘 보였다. 노랗게 물든 울산시 태화강국가정원의 나무들 아래로는 가을 억새가 햇빛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였다. 톤 다운된 초록색 진 재킷과 청바지 차림의 그는 동료들과 함께 찬찬히 땅을 살피고 있었다. 다소 심각한 표정이었다.
지난달 25일 울산 태화강국가정원 내 자연주의 정원에서 만난 피트 아우돌프. 울산=김선미 기자
“반갑습니다. 네덜란드에서 울산까지 오시느라 피곤하시겠어요.” 다가가 인사를 건네자 그는 굳은 표정을 풀고 미소로 반겼다. “기나긴 비행이었죠. 그래도 이렇게 아름다운 계절에 다시 와서 기쁩니다.” 그는 지난해 10월 태화강국가정원에 ‘후스·아우돌프 울산 가든-자연주의 정원’(1만8000㎡)을 조성한 네덜란드 출신의 세계적 정원 디자이너 피트 아우돌프(79)다.
자연주의 정원의 총괄 조경가인 바트 후스(오른쪽)와 피트 아우돌프. 울산=김선미 기자
그가 지난달 말 한국을 다녀갔다. 1년 된 태화강국가정원 내 자연주의 정원을 점검하고 새로운 ‘서울 프로젝트’를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지난달 25일 자연주의 정원에서 만난 그는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내년 봄을 준비하고 있었다. 알리움과 카마시아 등 구근 5만 개를 심는 일이었다.
태화강국가정원 자연주의 정원에 구근을 심으려고 뿌려놓은 모습. 피트 아우돌프 인스타그램
“구근은 정원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어요. 다른 식물들이 겨울잠을 잘 때, 구근이 먼저 꽃을 피우면서 봄을 알리니까요.”
한국의 자원봉사자들이 자연주의 정원에 구근을 심는 모습. 피트 아우돌프 인스타그램
아우돌프가 직접 손으로 그린 컬러풀한 식재(植栽)도에는 구획마다 각기 다른 구근 식물을 심는 안내사항이 담겨 있었다. ‘붉은 알리움은 35개씩 그룹 지어 30cm 간격으로 심을 것’, ‘무스카리는 100개씩 그룹 지어 흩뿌려 느슨한 간격으로 심을 것’…. 색색의 점으로 표현된 그의 식재도는 한 편의 그림 같았다. 한 장 얻어 액자에 담아 걸어두고 싶을 정도였다. 무엇보다 그때 깨달았다. ‘아, 야생의 초원을 떠올리게 하는 그의 자연주의 정원은 그냥 이뤄지는 게 아니구나. 실은 정교하게 계산된 것이었구나.’
피트 아우돌프가 손수 그린 구근 식재도. 울산=김선미 기자
피트 아우돌프 자연주의 정원은 자연에서 느낀 감흥을 예술적 식재로 표현한다. 비결은 여러해살이풀을 심는 것이다. 이른 봄 싹트는 순간부터 겨울에 식물의 형태가 남아있을 때까지 사계절 자연의 순환을 보여준다. 시드는 아름다움, 빛바램의 퇴장마저 관조한다는 측면에서 일본 와비사비(わびさび·불완전함의 미의식) 미학과도 통하는 것 같다.
아우돌프와 이번에 구근 심는 작업을 함께 한 오세훈 정원사는 말한다. “그라스(풀)의 수수한 느낌을 사랑하는 아우돌프는 구근류도 크고 화려한 것보다는 작고 부드러운 내추럴한 감성을 선호합니다.”
피트 아우돌프가 식재 작업을 맡은 미국 뉴욕 하이라인 파크. 목수책방 제공
미국 뉴욕 하이라인파크, 시카고 밀레니엄파크의 루리 가든, 독일 바일 암 라인의 비트라 캠퍼스, 영국 런던 서펜타인 갤러리 파빌리온 정원과 하우저앤드워스 소머셋 정원…. 80세를 앞둔 정원 디자인 거장의 행보는 거침이 없다. 바텐더와 웨이터, 생선 도매상 등을 하다가 조경을 배워 1975년부터 정원 디자이너로 활동해 온 아우돌프의 자연주의 정원들은 꽃과 장식 위주의 영국식 정원 문법을 깨뜨리는 ‘혁신’이었다. 그럴지라도 태화강국가정원 내 자연주의 정원은 그가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조성한 정원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도전이었다.
피트 아우돌프가 조성한 영국 하우저앤드워스 소머셋 정원. 목수책방 제공
―당신의 명성을 듣고 작년 11월 이곳에 와봤다. 하지만 당시엔 땅에 막 심은 모종들의 이름 푯말만 볼 수 있었다. 그 식물들이 지금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기대대로 잘 자란 건가.
“모두 잘 자랐다고 말하긴 어렵다. 그동안 여름이 건조한 북미와 유럽기후에 맞는 식물들을 주로 다뤄왔기 때문에 한국 기후에 어떤 식물이 맞는지 좀 더 살펴야 한다. 올해 여름 한국의 폭우가 식물들의 생장에 타격을 줬다. 그래도 더 많은 식물이 실망시키지 않아 다행이다.”
카시안 슈미트 독일 가이젠하임대 조경학과 교수(왼쪽)와 자연주의 정원을 살피고 있는 피트 아우돌프. 울산=김선미 기자
인사를 나누기 전, 그의 심각한 표정은 이런 상황 때문이었다. 그는 오랜 지인이자 자연주의 정원의 총괄 조경가인 바트 후스, 카시안 슈미트 독일 가이젠하임대 조경학과 교수 등과 함께 정원 구석구석을 돌며 식물들의 상태를 꼼꼼하게 살폈다. 식물 육종가이자 식물 마니아답게 한국의 습한 기후에 약하거나 수입이 원활하지 않은 식물은 다른 식물로 교체할 것을 바로바로 지시했다. 정원은 한 번 조성하고 마는 곳이 아니라 끊임없이 소통하며 관리하는 곳이었다.
피트 아우돌프의 지시에 따라 식재 변경을 표시해둔 구역. 울산=김선미 기자
―정원에 늘 새로운 식물을 시도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태화강국가정원 자연주의 정원에 한국의 자생식물도 심었나.
“향등골나물, 벌개미취, 돌마타리, 숫잔대 등을 심었다. 태화강국가정원 숲정원에는 가을 색이 고운 복자기나무와 당단풍나무도 심을 예정이다. 한국의 자연은 놀랍도록 아름답다. ”
태화강국가정원 자연주의 정원 전경. 울산=김선미 기자
―가을은, 한국의 자연은 당신에게 어떻게 다가오는가.
“모든 계절이 각각의 특징을 갖지만, 가을은 여름의 초록 잎들이 따뜻한 색으로 바뀌는 극적인 계절이다. 특히 한국의 가을 자연은 유럽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감성이 넘친다. 한국의 가을에서는 종종 시(詩)적인 순간을 느낀다.”
―그런 시적인 순간을 느끼는 한국의 장소는.
“경기 포천시에 있는 국립수목원이다. 종(種) 다양성과 식물들의 색감이 풍성하다.”
피트 아우돌프가 찍은 국립수목원의 가을. 피트 아우돌프 인스타그램
그는 이번 한국방문 기간 태화강국가정원 일정을 마친 후 국립수목원도 둘러봤다. 그를 안내했던 배준규 국립수목원 정원연구센터장은 “아우돌프는 소나무숲의 하층 식생 등 다양한 식물들이 조화롭게 어울려 사는 모습에 큰 관심을 보였다”며 “가을 낙엽을 주워 담으면서 우리나라의 식생 경관에 감탄했다”고 전했다. 동행했던 카시안 슈미트 교수도 “환상적인 가을 색상을 보여주는 한국의 비목나무를 이번에 새롭게 알게 돼 기쁘다”고 했다.
국립수목원의 비목나무 앞에서 피트 아우돌프(왼쪽에서 두번째). 카시안 슈미트 교수 인스타그램
아우돌프는 가을 햇볕이 쨍쨍한 정원 돌무더기에 걸터앉아 성심껏 질문들에 답했다. 진작부터 알고 지내던 동네 어르신 같은 느낌이었다. 인터뷰 도중 그가 시계를 확인하더니 양해를 구했다. “5분만 실례할게요. 아내와 화상 통화하기로 약속한 시간이어서요.” 그는 휴대전화 화면에 나타난 아내에게 태화강국가정원의 모습을 구석구석 보여주었다. 통화 도중 주변 사람들에게도 화면을 보여줘 네덜란드에서 아침을 맞는 그녀에게 인사할 수 있었다.
네덜란드에 사는 아내와 화상통화를 하다가 인사를 시켜주는 피트 아우돌프. 울산=김선미 기자
그의 아내 안야 아우돌프는 지금의 피트 아우돌프를 만든 영혼의 동반자다. 1982년 부부는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네덜란드 동부 시골 마을 후멜로의 오래된 농가로 이사했다. 정원 디자이너로 인생의 길을 정한 남편이 너른 땅에서 식물을 기를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부부가 아이들과 함께 집을 수리하고 육묘장을 만든 그들의 거처 ‘후멜로’는 오랫동안 세계적 정원 투어의 성지였다. 그가 다루는 식물을 재배하는 육묘장이 이제는 많이 생겨나 부부는 2010년대 들어 후멜로를 닫고 정원 디자인에 주력하고 있다. 그래서 쾌활한 성격으로 멀리에서 온 손님들을 반갑게 맞던 안야의 모습을 많은 이들이 그리워한다.
피트 아우돌프와 아내 안야 아우돌프. 목수책방 제공
―정원 이야기로 돌아오겠다. 태화강국가정원에 어떤 가치를 담고 싶었나.
“처음에 태화강 이야기를 듣고 ‘울산 프로젝트’(태화강국가정원)를 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태화강은 2000년대 초까지 공장 폐수로 오염됐다가 생명의 강으로 부활했다. 내 인스타그램 계정을 방문해 내가 만든 정원을 좋아하는 연령층을 보면 주로 25~40세다. 태화강국가정원이 젊은 세대가 찾아와 자연을 접하는 ‘지속 가능한’ 정원이 되기를 바란다. 자원봉사자들이 찾아와 함께 해 주는 모습이 힘이 된다.”
대나무숲이 울창한 태화강국가정원 십리대숲 모습. 울산=김선미 기자
―세계적 공공정원과 개인정원들을 조성해왔다. 공공정원과 개인정원은 어떻게 접근방법이 다른가.
“두 정원은 완전히 다르다. 개인정원에는 정원주의 요구에 맞춰 아이가 타고 올라갈 나무를 심거나 수영장을 만든다. 반면 공공정원 작업은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경관을 만드는 일이다. 집에 정원이 없는 사람들이 편히 찾아와 자연의 변화에 감동하고 경관에 대해 열린 관점을 갖도록 하는 일이다.”
피트 아우돌프가 사랑하는 ‘하하통카’를 심은 자연주의 정원. 울산=김선미 기자
―최근 작업 중인 글로벌 프로젝트들은.
“스웨덴 반달로룸 미술관 정원 작업을 막 끝냈다. 또 알렉산더 칼더의 예술과 아카이브를 전시하는 칼더 재단의 의뢰를 받아 미국 필라델피아의 벤저민 프랭클린 파크웨이에 정원 공사를 시작했다. 올해 초에는 예술출판사 ‘파이돈’을 통해 오랜 지인 작가인 노엘 킹스베리가 그간의 내 작업을 정리한 ‘Piet Oudolf at Work’이라는 책도 출판됐다.” (아우돌프는 예술계와 활발하게 교류하고 있다. 일본을 대표하는 건축가 세지마 가즈요가 2010년 베니스 비엔날레 때 옥외 전시로 아우돌프에게 정원을 만들어달라고 주문하면서부터 교류가 시작됐다.)
2010년 베니스 비엔날레 때 조성된 피트 아우돌프 정원. 목수책방 제공
지난달 27일은 그의 79번째 생일이었다. 그는 한국에서 지인들이 준비해준 생일파티를 네 번이나 가졌다. 아우돌프 부부가 반려견들과 정원을 산책하는 모습을 넣은 생일 케이크도 선물로 받았다. 울산에서는 소주와 맥주, 서울에서는 김치 요리를 즐겼다. 29만 명의 팔로워를 지닌 그의 인스타그램에는 그가 올린 한국의 가을 풍경들이 각국 팔로워들의 경탄을 자아냈다.
피트 아우돌프의 79번째 생일을 축하하며 한국의 한 정원사가 준비한 케이크.
―79번째 생일을 한국에서 보낸 소감은.
“생일 이틀 전부터 생일 다음날까지 나흘 연속 축하를 받았다. 지금껏 고국에서도 이렇게 축하를 받아본 적이 없다. 한국은 자연뿐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이 아름답다. 한국에 올 때마다 따뜻한 환대와 도움을 받는다. 먼 거리여도 한국에 자주 오고 싶다.”
피트 아우돌프가 자원봉사자들에게 식재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울산=김선미 기자
사실 세계적 정원 디자이너라는 명성 때문에 지레 걱정했더랬다. 아우돌프가 상대하기 어려운 성격이면 어쩌나 하고. 기우였다. “식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마음을 열고 반기는 분”이라던 주변 얘기들이 맞았다. 그가 조성한 정원 이름이 ‘후스·아우돌프 울산 가든-자연주의 정원’인 것도 그의 한 면모를 보여준다. 그는 자신보다 먼저 울산을 방문해 조경의 큰 그림을 그린 바트 후스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보다 앞에 두도록 했다.
오랜 지인 조경가 바트 후스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아우돌프)보다 앞세운 자연주의 정원 간판. 울산=김선미 기자
태화강국가정원에는 아우돌프가 직접 육종한 ‘살비아 랩소디 인 블루’ 등의 식물이 한국 자생식물들과 어우러져 산다. 야생을 사계절 내내 풍경 시(詩)로 구현해내는 그의 정원에서는 식물들이 공동체를 이루면서 생명력을 갖는다. 하지만 50년 가까운 경력의 세계적 정원 디자이너에게도 낯선 아시아 대륙의 한국 기후와 토양은 크나큰 도전이었으리라.
온종일 식재상황을 살피다가 해질 무렵 자연주의 정원을 바라보고 있는 피트 아우돌프. 울산=김선미 기자
어릴 적 즐겨 봤던 찰스 M 슐츠의 책 ‘사랑이란 손을 잡고 걷는 것’을 떠올린다. 사랑은 지켜봐 주는 것, 아플 때 곁에 있어 주는 것이라고 했다. 죽음의 강을 생명의 강으로 살려낸 태화강은 한국의 소중한 자연이다. 태화강국가정원은 ‘피트 아우돌프’라는 이름에만 기대면 안 된다. 모두가 합심해 지켜보고 아껴야 한국을 사랑하는 정원 디자인 거장이 꿈꿨던 지속가능한 정원이 될 것이다.
울산=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