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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급망법’ 등 17개 경제법안, 평균 14개월째 국회서 낮잠

입력 | 2023-11-09 03:00:00

[표류하는 경제·민생법안]
보조금관리법 3년반째 계류
“정치 공방에 국민 뒷전” 지적



2일 전남 광양 포스코퓨처엠 양극재 광양공장에서 김상무 제2공장 공장장이 양극재 제조 공정을 설명하고 있다. 리튬을 원료로 하는 양극재가 안정적으로 생산되지 않으면 이차전지 생태계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 광양=송혜미 기자 1am@donga.com


2일 전남 광양시 포스코퓨처엠 양극재 광양공장의 자동화 창고에는 8층 높이의 선반이 빼곡하게 늘어서 있었다. 칸마다 올려진 대형 폴리에틸렌(PE) 자루에 든 건 양극재의 핵심 원료인 리튬. 5340m² 면적의 이 창고에는 리튬 등의 원료와 양극재 완제품이 최대 1만2000t까지 들어간다. 리튬이 없으면 공장 가동을 멈출 수밖에 없어 만일의 사태까지 대비해 창고에 리튬을 가득 채울 수밖에 없다.

2021년 요소수 대란에 이어 최근 중국의 잇따른 갈륨, 흑연 수출 통제를 경험한 기업들은 원자재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실제로 포스코는 이 공장 바로 옆에 ‘포스코HY클린메탈’의 이차전지 재활용 공장을 세워 폐배터리에서 리튬을 재추출하고 있다. 남미와 중국에서 매일 30∼40t의 리튬을 들여오고 있지만 자체적으로 배터리 소재 생태계를 만들려는 노력이다. 그러나 정부가 공급망을 안정시켜 기업들을 돕겠다면서 마련한 법은 1년 넘게 국회에서 표류하고 있다. 새로 만들어지는 공급망안정화위원회를 어디 산하에 둘지 등을 놓고 여야가 이견을 보이면서 입법이 차일피일 미뤄진 결과다. 동아일보가 정부가 주요 입법 과제로 삼고 있는 경제·민생 법안들 가운데 국회에 계류 중인 법안들을 살펴본 결과 총 17건이 평균 13.7개월째 국회 문턱을 못 넘고 있었다. 특히 국고 보조금에 대한 외부 회계검증 기준을 지금보다 대폭 강화해 보조금 부정 수급을 막겠다며 발의된 ‘보조금 관리에 관한 법률 개정안’의 경우 국회 상임위에서 3년 6개월째 공전 중이다.

조진만 덕성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과거엔 별다른 쟁점이 없는 법안은 우선 신속하게 처리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최근 국회에선 정치적 공방 때문에 비쟁점 법안도 뒤로 밀리는 분위기”라며 “민생과 경제를 입으로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산업과 미래 먹거리 등을 위한 법안 처리에 보다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리튬없인 공장 스톱” 기업 절박한데… ‘공급망법’ 1년 넘게 표류


17개 경제 법안 국회서 낮잠
공급망 위기 관리 시스템 구축 법안
여야 논란끝 상임위 문턱 겨우 넘어
우주강국 도약 ‘우주청 설치 특별법’
R&D 기능 놓고 충돌, 반년째 계류

“광양공장에선 1년에 전기차 100만 대 분량의 양극재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핵심 원료인 리튬이 없으면 이 양극재 공장은 가동을 멈출 수밖에 없고, 이차전지 산업 전체도 큰 타격을 피하기 힘듭니다.”

2일 광양공장에서 만난 김상무 포스코퓨처엠 광양양극재2공장 공장장의 얘기다. 반도체의 뒤를 이어 한국의 미래 먹거리로 꼽히는 이차전지 분야에서 LG에너지솔루션 등의 기업은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갖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이차전지의 핵심 소재인 양극재와 음극재 등이 안정적으로 생산되지 않으면 이차전지 생태계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


● 입법 지연에 ‘공급망 사령탑’ 못 만드는 정부
최근 중국은 음극재의 핵심 원료인 흑연의 수출 통제에도 나선 상황. 전 세계적으로 ‘자원 무기화’가 이어지면서 공급망 교란 우려가 커진 가운데 정부 공급망 대책의 핵심으로 꼽히는 건 ‘경제 안보를 위한 공급망 안정화 지원 기본법’이다.

국민의힘 류성걸 의원이 대표 발의한 이 법안은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소속으로 공급망안정화위원회를 신설하고 경제 안보 관점에서 위기 관리에 나서는 정부 시스템을 구축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위원회가 공급망 안정화를 위한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면서 위험 포착과 위험 예방, 위기 대응의 사이클을 체계화하겠다는 것이다. 한국수출입은행이 운용하는 공급망안정화기금을 설치해 기업의 원자재 수입 국가 다변화와 비축 물량 확대를 돕는 내용도 담겼다.

하지만 지난해 10월 발의된 법안은 신설 위원회의 소속을 어떻게 할지와 안정화 기금 운영에 따른 재정 부실 우려를 놓고 여야 간에 논란을 빚은 끝에 올 8월에야 상임위 문턱을 넘어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돼 있다. 기재부 관계자는 “정부가 공급망 문제에 대응할 수 있는 큰 틀을 갖추면서 기금을 활용해 각 기업이 공급망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게 도울 수 있다는 점에서 시급한 법안”이라고 말했다.


● 기업이 직접 개정 요청한 법도 하세월
지난달 31일 서울 강서구의 LG 인공지능(AI)연구원에선 LG그룹 각 계열사에서 온 수강생들이 AI 교육을 받고 있었다. AI연구원은 석·박사 과정을 운영하는 LG그룹의 사내 대학원으로, 경쟁률이 10 대 1에 이를 정도로 인기가 높다.

그러나 현재 법으로는 사내 대학원에서 정식으로 석·박사 학위를 수여할 수 있는 길이 막혀 있다. 김향미 AI아카데미팀장은 “열심히 공부한 직원에게 실질적인 보상을 주는 차원에서 외부와 동등한 학위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AI연구원에서 교육부 등에 직접 법 개정을 요청한 이유”라고 말했다.

정부는 기업들의 이런 목소리를 반영해 올 5월 직접 ‘첨단산업 인재혁신 특별법’을 발의했지만 이 법안 역시 상임위에서 더 이상 진전이 없다. 여야 간에 큰 이견은 없지만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정부 관계자는 “쟁점 법안이 아니더라도 국회의 관심에서 밀리면서 소외된 법안도 적지 않다”고 했다.

우주 강국 도약과 우주시대 개막을 목표로 새로 출범시키려던 우주항공청도 여전히 국회 논의 중이다. 올 4월 정부가 발의한 ‘우주항공청 설치 및 운영에 관한 특별법’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소속의 우주항공청을 새로 만들고 우주항공과 관련한 정책의 수립과 조정, 기술개발·산업육성 등을 총괄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우주항공청이 직접 연구개발(R&D)을 수행할 수 있게 할 것인지를 놓고 여야가 충돌하면서 상임위 심사만 계속되고 있다. 최근에는 한국항공우주연구원과 한국천문연구원을 우주항공청 산하로 옮겨 이 논란을 해소하는 방안까지 제시됐지만 여전히 상임위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최근 달 탐사에 성공하면서 우리에게 충격을 준 인도의 경우 일찌감치 전담기관을 설립해 우주 개발에 나선 바 있다”며 “글로벌 우주 경쟁에서 미국 등 선도국을 따라잡기 위한 구심체라는 점을 내세워 국회를 설득 중”이라고 말했다.



세종=김도형기자 dodo@donga.com
광양=송혜미 기자 1am@donga.com
김형민 기자 kalssam3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