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관 방송통신위원장이 9일 오후 국회 본회의장에서 눈을 감은 채 앉아있다. 더불어민주당이 이날 본회의에 이 위원장 등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당론으로 채택해 올리자, 국민의힘은 탄핵안 표결을 막기 위해 준비했던 ‘필리버스터’를 기습 철회하고 퇴장했다. 국민의힘 불참 속에 노란봉투법과 방송3법을 이날 강행 처리한 민주당은 이 위원장 등에 대한 탄핵안을 11월 30일 본회의에 다시 올리겠다고 밝혔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9일 오후 3시경 본회의장을 취재 중이던 후배 권구용 기자가 보내온 카카오톡 메시지. 이 때만 해도 기자들은 물론 현장에 있던 의원들도 국민의힘의 필리버스터 철회 계획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권구용 기자 제공
국민의힘은 노란봉투법과 방송법, 방송문화진흥법, 한국교육방송공사법 등 총 4개 법안에 대한 필리버스터 신청을 미리 받아 60명 의원 명단도 짜놨습니다. ‘검수완박’ 이후 18개월 만의 필리버스터인데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열리는 21대 국회 마지막 필리버스터이다 보니 ‘제2의 윤희숙’ 같은 타이틀을 노리고 나름 열심히 준비한 의원들도 적지 않았다고 하죠. 해당 의원실 보좌진마다 필리버스터에 대비한다고 여념이 없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9일 본회의에서 열릴 필리버스터에 참여하기로 했던 국민의힘 의원 명단 및 순서. 노란봉투법과 방송3법 등 총 4개 법안에 대해 60명의 의원이 필리버스터를 신청했다.
국민의힘 윤재옥 원내대표가 9일 오후 국회 본회의장 자리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생각하고 있다. 윤 원내대표는 이날 애초 예정돼 있던 당 차원의 필리버스터를 긴급 철회하고 퇴장해 이동관 방송통신위원장 등에 대한 더불어민주당의 탄핵안 표결을 막았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민주당이 이날 오후 1시 40분쯤 의원총회 중 이동관 방송통신위원장과 손준성·이정섭 검사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접수했다는 사실을 인지한 뒤 ‘결단’을 내렸다는 겁니다.
더불어민주당 고민정 최고위원이 9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본회의 도중 SNS에 올릴 문구를 적고 있다. “방통위원장 이동관 탄핵 /민주당 당론 결정!” 이라고 적는 모습. 뉴스1
더불어민주당 박찬대 최고위원도 9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자신의 SNS에 올릴 글을 쓰는 모습이 언론 카메라에 포착됐다. “이동관 방통위원장, 손준성·이정섭 검사 탄핵소추안 당론발의.. 노조법, 방송법 개정(안 상정)”이라고 적고 있는 모습. 뉴스1
국민의힘 의원들이 9일 본회의 도중 필리버스터를 철회하며 일제히 퇴장하자 더불어민주당 홍익표 원내대표(뒷줄 왼쪽에서 두번째) 등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솔직히 지켜보는 입장에선 꼼수든 아니든, 21대 국회 내내 의석수에서 민주당에 밀려 질질 끌려만 다니던 국민의힘이 ‘거야(巨野)의 폭주’를 처음으로 멈춰 세웠다는 점에선 통쾌하더군요. 다만 그게 여야 간 협상이 아닌 국회법을 역이용한 잔머리 덕이었다는 점은 아쉬웠습니다. 더군다나 국민의힘이 노란봉투법과 방송3법을 그동안 그토록 목 놓아 반대했던 것을 떠올려보면 그렇게 쉽게 표결을 포기하고 나가버리는 것이 과연 옳은가라는 생각도 들더군요. 소수정당으로서 마지막 반발과 항거를 필리버스터라는 역사의 기록으로라도 남겼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국민의힘 의원들이 당 지도부 결정에 따라 9일 본회의장에서 한꺼번에 퇴장하고 있다. 사진상 위쪽이 비어버린 국민의힘 의석. 더불어민주당 등 야당 의원들만 남아 노란봉투법과 방송3법을 단독으로 통과시켰다. 뉴스1
국민의힘은 탄핵안이 이미 본회의에 의제로 보고됐기 때문에, 해당 탄핵안을 재추진하는 것이 법적으로 무효라고 했습니다. 반면 민주당은 ‘꼼수 원조정당’ 답게 전날 본회의에 올렸던 탄핵소추안을 부랴부랴 철회했죠. 국회에 보고만 됐다고 해서 바로 안건이나 의제가 됐다고 볼 수 없고, 일사부재의(부결된 안건은 같은 회기 중 다시 발의하거나 제출할 수 없다) 원칙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민주당 박주민 원내수석부대표는 이날 기자회견을 열고 “어제 제출한 탄핵안과 관련해 당이 이날 오전 철회서를 제출했고, 철회서가 접수 완료됐다. 이번엔 철회했지만, 이달 30일과 다음 달 1일 연이어 잡혀 있는 본회의 등을 시점으로 탄핵안 추진을 이어 나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대로라면 이 위원장과 검사 2명에 대한 탄핵안 처리 시점은 11월 10일에서 12월 1일로 약 20일 정도 미뤄지게 됩니다. 그 20일 새 무슨 일이 있겠냐 했는데, 머리 좋은 의원님들은 역시 이미 또 한 단계를 앞서 내다보고 계시더군요.
국민의힘은 민주당이 방통위 업무를 최대한 빨리 마비시켜 내년 총선에 유리한 여론을 형성하려 한다고 보고있죠. 박정하 수석대변인은 “왜 유독 탄핵안은 이렇게까지 하는 것인가. 지금껏 민주당이 손에 쥐고 장악했던 방송을 내려놓을 수 없고, 방송 정상화를 늦추기 위해 방송통신위원장의 직무를 정지시켜야 하는 목적이라는 의심을 지우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예산안 심사가 본격 시작되는 이번 주에도 여야의 피 튀기는 수싸움이 이어질 전망입니다. 의원님들께서 그 좋은 머리를 민생을 위한 예산안과 법안을 통과시키는 데에도 좀 더 많이 써주시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