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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국경 봉쇄 풀며 사치품 수입 크게 늘렸다… 1년 만에 15배[인사이드&인사이트]

입력 | 2023-11-13 23:30:00

북한 사치품 수입 실태
식량난에 아사자 2배 증가… 金일가 방러 기간 명품 과시
시계·승용차 하사 ‘선물 정치’… ‘당 39호실’ 사치품 조달 주도
봉쇄 완화로 열차 수입 증가… “中, 사치품 수입 방치” 지적



1000만 원대의 IWC(빨간 원)를 착용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2년 노동당 창건 75주년 기념 열병식 연설 도중 눈물을 닦고 있는 모습. 노동신문 뉴스1


‘몽블랑, IWC, 디올, 구찌….’

신규진 정치부 기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위해 열차를 타고 러시아를 전격 방문한 9월, 북한 노동신문에는 이런 서구 명품 브랜드들이 등장했다. 북-러 정상회담 당일 김 위원장은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수백만 원대 몽블랑 만년필로 방명록을 적었다. 손목엔 1000만 원대 IWC 시계가 번쩍거렸다. 김 위원장의 다음 방문지인 유리 가가린 전투기 공장. 김 위원장의 여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이 크리스찬디올 핸드백을 들고 나왔다. 송아지 가죽 재질로 900여만 원에 판매되는 가방이었다. 북한의 외교 사령탑인 최선희 외무상도 현재는 단종됐으나 온라인 중고 거래로 1300만 원가량에 거래되는 구찌 핸드백을 방러 기간 중 들었다.》






● 김여정의 디올백, 北주민 7년 소득과 같아
방러 기간 ‘백두혈통’ 김 위원장 일가를 비롯한 북한 최고위층은 명품으로 치장했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북한은 올해 최악의 식량난에 직면해 있다. 연간 80만∼100만 t에 달하는 만성적 식량난을 겪는 북한이지만 올해는 더욱 심각하다. 7월까지만 아사(餓死) 사건이 240여 건 발생했다. 정보당국에 따르면 이는 같은 기간 평균 110여 건에 비해 2배 이상으로 증가한 것. 지난달 소형 목선을 타고 귀순한 북한 주민 4명도 “먹고살기 위해 내려왔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대북 소식통은 “그동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국경이 봉쇄됐고 북-중 접경지 장마당 통제가 강화되면서 식량난이 가중됐다”면서 “배급 불평등도 더욱 왜곡된 상황”이라고 했다.

올해 9월 러시아 유리 가가린 전투기공장에서 김 위원장의 여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이 900만 원대 크리찬 디올 핸드백(빨간 원)을 든 모습이 포착됐다. 노동신문 뉴스1

이에 명품으로 치장하고 해외 순방에 나선 북한 최고위층의 모습은 역설적으로 참혹한 북한 내부 상황을 더욱 부각시켰다는 지적이 나온다. 북한의 1인당 국민총소득은 143만 원. 일반 주민들은 끼니를 굶고 7년을 모아야 김여정의 ‘디올백’을 살 수 있다는 의미다. 통일부는 지난달 19일 이례적으로 북한 김 위원장 일가의 사치품 현황을 브리핑하면서 “북한이 정말 주민들을 생각한다면 대북제재 위반인 사치품 수입에 몰두할 게 아니라 민생을 돌보고 비핵화 길로 나오길 바란다”고 지적했다.



● 김정은, 열병식서 1000만 원대 시계 착용
김 위원장 일가의 명품 사랑은 사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김 위원장은 2011년 집권 이후 일반 주민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사치품을 노동신문이나 조선중앙TV 등 관영매체에 노출시켜 왔다. 열병식 등 주요 행사에선 1000만 원대 IWC 시계를 자주 찼고, 롤렉스나 2억 원이 넘는 파텍필립 시계까지 즐겨 착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인 리설주 역시 샤넬, 디올 핸드백이나 티파니 목걸이 등을 공개 행사 때 착용하고 나왔다. 미국의 농구스타 데니스 로드먼은 2013년 방북 이후 “리설주가 구찌와 베르사체를 좋아한다”고 했다. 김 위원장의 딸 주애는 3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7형 시험 발사 참관 당시 240만 원 상당의 디올 제품으로 추정되는 검은색 외투를 입고 등장해 화제가 됐다. 통일부는 탈북자 증언과 정보 당국의 현지 정보 등을 취합해 분석한 결과 김 위원장 일가만을 위해 공급되는 사치품이 연간 수억∼수십억 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김 위원장의 할아버지인 김일성 때부터 ‘선물 정치’도 이어지고 있다. 주요 행사 때마다 간부 선물용으로 사치품을 소비하고 있다는 것. 정부 관계자는 “김 위원장이 각별히 총애하거나 군사 분야에서 특별한 성과를 거둔 간부들에게 고급 승용차를 하사한다”며 “김 씨 일가 생일이나 당 대회 등 대형 행사를 계기로 스위스제 시계나 최신 전자제품도 지급된다”고 했다.

오경섭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김 위원장이 스위스 유학 생활을 했기에 일가의 명품 브랜드 종류나 수요가 아버지인 김일성 때보다 더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이어 “충성의 대가로 경제적 인센티브를 주는 방식으로 사치품을 통치에 활용하고 있다”고도 했다.

김 위원장은 그동안 여러 차례 신년사를 통해 수입품을 선호하는 세태를 ‘수입병’으로 규정하며 “타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북한에선 여전히 사치품이 ‘부르주아 사상문화’나 ‘반사회주의적 행태’로 인식돼 집중 단속 대상이다. 대북 소식통은 “결국 김 위원장 일가나 평양 고위층들만 ‘수입병’ 예외 대상인 셈”이라고 강조했다.

● 金 재가로 사치품 구매, 도착지 속여 밀수
김 위원장 일가에게 사치품은 어떻게 조달될까. 일단 북한의 해외 사치품 반입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제재 결의 위반이다. 유엔 안보리는 2006년 10월 대북제재 결의 1718호로 북한의 사치품 수입을 금지한 데 이어 2016년 2270·2321호 등을 통해 그 품목을 늘려 왔다.

제재 수위가 높아진 만큼 북한은 더 은밀하게 사치품을 수입하고 있다. 먼저 평양의 서기실이나 최고위층이 카탈로그나 해외 잡지를 통해 물품을 직접 고른다. 이후 김 위원장의 재가를 거쳐 해외에 구매 지시가 내려진다. 현지에서 물품을 조달하는 역할은 중국, 러시아 등 친북 성향 국가들이나 유럽에 파견된 공관·상사원들이 맡는데 북한 당국은 해외에 장기 체류하는 북한 국적자들의 인적 네트워크를 활용해 사치품 구매에 가담할 현지인, 무역상사 등 협조망을 구축하는 것으로도 전해졌다. 사치품 구매 지시가 떨어지면 이들을 활용하거나 페이퍼컴퍼니 설립, 차명 위탁 계약 체결 등의 방식으로 거래가 진행된다. 이 과정 전반에 평양의 서기실 지휘 아래 김 위원장 일가 통치자금 관리 및 외화벌이를 담당하는 당 39호실이 주도적으로 관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각국에서 구매한 사치품들은 일괄적으로 북-중 접경지에 집하돼 해상이나 육로, 항공편을 통해 운송된다. 특히 경유지를 여러 단계 거치면서 최종 도착지를 속여 밀수가 이뤄진다고 한다. 2018년 김 위원장의 ‘방탄 마이바흐’ 전용차량 2대가 8개월간 이탈리아, 네덜란드, 중국, 일본, 한국, 러시아 등 6개국을 거쳐 평양에 들어간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 당시 차량을 실은 아프라카 토고 국적의 화물선은 부산항에서 러시아로 이동할 때 자동식별장치(AIS)를 끄면서 추적을 피했다. 또 소규모 물품은 주로 중국 다롄에서 반입되거나 대규모 물품은 홍콩, 대만을 거쳐 산둥반도에 이른 뒤 AIS를 끄고 북한으로 옮겨지기도 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 중국발 사치품 반입 회복세
사치품은 주로 화물선으로 반입돼 왔지만 최근 화물 열차나 차량 이용의 비중이 늘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봉쇄가 완화되면서 신의주 일대 육로 등이 개방됐기 때문. 통일부 관계자는 “국경 봉쇄로 반입 규모가 위축됐으나 지난해 하반기(7∼12월)부터 다시 회복되는 양상”이라고 했다.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이 중국 해관총서(세관) 통계를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북한이 중국으로부터 들여온 사치품 수입 규모는 2021년 184만 달러에서 지난해 2851만 달러로 껑충 뛰었다. 올해 7월까진 4064만 달러를 기록했다. 특히 시계나 가죽 제품, 화장품, 주류 등이 크게 증가했다. 선물 통치에 활용되는 시계 수입은 지난해 17만 달러에서 올해 356만 달러로 21배로 늘었다. 북한은 올해 3분기(7∼9월)까지 중국에서 약 287만 달러(17만1000L)의 위스키를 수입했는데, 이는 해관총서에 위스키 거래 내역이 기록되기 시작한 2010년 이후 최대였다. 이 기간 와인 수입 규모도 역대 최대치인 231만 달러를 기록했다.

2010년대 중반까지 연간 수만 달러에 달했던 사치품 반입 규모가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로 크게 줄었다가 제재가 닿지 않는 품목들을 중심으로 다시 수량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북한의 최대 교역국인 중국이 북한의 사치품 수입을 방치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북한 경제를 옥죄는 대북제재들은 전반적으로 잘 작동해 왔지만 중국이 협조하지 않는 한 한계가 있다”면서 “사치품 구매가 이뤄지는 통치 자금을 고갈시키기 위한 근본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신규진 정치부 기자 newj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