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신라군에 참수된 백제 성왕… 두개골 행방 아직도 모호[이한상의 비밀의 열쇠]

입력 | 2023-11-13 23:33:00

1915년 발견된 충남 부여 백제왕릉원 무덤 6기 중 3호분. 이들 무덤은 발굴 당시 모두 도굴된 상태라 연구가 이뤄지지 못했다. 하지만 1971년 무령왕릉이 발굴되며 비교 연구가 진행됐고, 6기 중 2호분이 성왕의 능인 것이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백제 후기를 장식한 성군 성왕은 태자를 만나러 가다가 신라군에 잡혀 참수됐고 그의 머리는 끝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제공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


백제 왕 가운데 가장 비참한 최후를 맞은 인물로 제26대 성왕이 꼽힌다. 그는 전장의 태자(훗날 창왕)를 위문하러 관산성으로 향하다 신라군에 사로잡혀 참수돼 구덩이에 묻혔는데, 후에 신라는 그의 머리뼈를 관청 건물 계단 아래로 옮겨 묻어 백관들이 그 위를 지나가게 했고 나머지 뼈는 백제로 보냈다고 한다.

국가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성왕의 비참한 죽음은 백제 사회를 지극한 슬픔으로 내몰았을 것이다. 극심한 괴로움에 시달리던 창왕은 두개골이 없는 부왕의 유골로 어떻게 장례를 치렀고, 또 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을까.


참혹하게 파헤쳐진 왕의 무덤
근래 학계에선 성왕이 부여 백제왕릉원에 안장된 것으로 보는 데 큰 이견이 없다. 이 왕릉원이 처음 발굴된 것은 1915년의 일이다. 도쿄제국대 구로이타 가쓰미 일행은 그해 7월 9일, 부여 능산리 산자락에서 무덤 발굴에 나섰다. 그곳엔 백제 왕릉으로 전하는 무덤 6기가 남아 있었다. 그들은 가장 큰 2호분(중하총·中下塚)과 가장 작은 3호분을 선택했다. 남쪽으로 길쭉한 널길과 돌문을 갖춘 구조이므로 그쪽부터 조사하면서 무덤방으로 접근해야 하지만 그들은 천장을 뚫고 내부로 진입했다.

당시는 남의 무덤에 손대면 천벌받는다는 생각에 도굴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구로이타 일행은 무덤 안에서 백제와 왜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 유물이 쏟아질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천장 일부를 제거하고 무덤 속을 내려다보았을 때 그 속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미 오래전 도굴된 것이었다. 그들은 660년 백제를 점령한 당나라군이 약탈한 것으로 추정하면서 “부여는 우리(일본) 상대 문명과 긴밀한 관계를 지닌 백제 땅인데, 유물이 흩어져 그 문화를 알 수 없다”며 실망감을 드러냈다.

발굴을 마무리한 것은 같은 달 16일이다. 폭우로 조사를 중단한 사흘을 빼면 5일 만에 왕릉 2기를 ‘뚝딱’ 발굴한 것이다. 그들이 판 2호분이 성왕의 무덤일 가능성이 크지만 발굴 시점은 물론 1960년대까지도 그러한 인식은 없었다.

처음 발견된 백제 고분벽화
1915년 7월 15일, 뒤늦게 부여에 도착한 도쿄제국대 세키노 다다시 일행은 이튿날 무덤 발굴을 시작했다. 그들은 왕릉원에서 두 번째로 큰 5호분을 팠는데, 역시 천장을 뚫고 내부로 진입했다. 그 무덤 역시 오래전 도굴된 것이었지만, 앞의 두 무덤과는 달리 금동제 유물 여러 점이 남아 있었다. 그 가운데 오각형 금동판은 왕의 관에 부착하였던 장식품으로 추정된다. 발굴은 사흘 만에 끝났고, 세키노는 이 금동판 문양을 “중국 남조 양식을 이은 것으로 일본 아스카시대 공예품의 조형”이라고 평가했다.

나머지 3기의 무덤은 2년 후 조선총독부 야쓰이 세이이쓰 일행에 의해 발굴됐다. 야쓰이 일행은 1917년 9월 고적 조사를 위한 출장길에 나섰다. 박물관 진열품 확보를 명분으로 내세우며 서울 석촌동 고분군, 부여 능산리 고분군, 익산 쌍릉 등 백제 왕릉급 무덤을 차례로 파헤쳤다. 며칠간 부여에 머무르면서 발굴한 무덤 가운데 1호분(동하총)에서 중요 성과가 나왔다. 이미 도굴되기는 했지만, 무덤 내부에 벽화가 남아 있었다. 무덤방의 네 벽에 사신도(四神圖)가, 천장에 연꽃과 구름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백제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벽화이다.

이처럼 일제강점기에 공주, 부여, 익산에 소재한 백제 왕릉은 대부분 발굴됐지만 무덤 주인공을 특정할 만한 결정적 실마리는 드러나지 않았다. 그로 인하여 백제 왕릉에 관한 연구는 지지부진했다.

성왕릉 둘러싼 수수께끼들

백제왕릉원 1호분에서 출토된 금동제 목관 장식(위 사진)과 성왕의 영정. 국립부여박물관 제공·동아일보DB

1971년 7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백제 왕릉 하나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으니 성왕의 아버지, 무령왕의 능이었다. 1500년 가까이 도굴 혹은 약탈적 발굴을 피해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은 천운에 가깝다.

무령왕릉 널길과 무덤방 천장 구조가 터널식이라는 점이 밝혀지자 1970년대 후반부터 그것과 부여 소재 왕릉의 구조를 비교하는 연구가 진행됐다. 그 결과 왕릉원 무덤들 가운데 터널형 천장을 갖춘 2호분이 사비천도 후 가장 먼저 축조된 왕릉급 무덤이고, 규모 또한 가장 크다는 점에 주목하여 성왕의 능일 것이라는 견해가 나왔고, 지금까지 별 이론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만 성왕의 장례가 언제, 어떤 방식으로 치러졌는지 알기 어렵다. 역사 기록으로 보면 신라의 말 키우는 노비 출신 고도라는 인물이 성왕의 목을 벤 다음 구덩이에 묻었고 그 이후 백제로 유골 일부가 전해졌다고 하므로 백제에서는 성왕의 시신 없이 먼저 무덤을 축조하고 장례식을 거행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신라로부터 유골을 돌려받은 후 개장하였다면 그 시점은 언제일까. 삼국사기에 따르면 관산성 전투 이후 약 6년 동안 백제와 신라 사이의 갈등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그 시점에 유골을 환수했을 것 같다. 그러나 561년 이후 두 나라 간 갈등의 불씨가 재점화하면서 성왕의 두개골은 끝내 백제로 돌아오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1995년 백제왕릉원에 인접한 한 사찰 목탑터에서 “567년 백제 창왕의 누이가 부처 사리를 공양했다”는 기록이 드러났다. 이 기록을 토대로 학계에선 이 절이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능사(陵寺)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시점에 이르러 유골 환수를 위한 외교적 노력이 절벽에 부딪히게 되자, 창왕과 그의 누이는 성왕이 불교에 심취하여 전륜성왕을 꿈꾸었음을 고려하여 절을 짓고 부왕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게 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근래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부여와 공주에서 일제강점기에 발굴된 백제 왕릉을 다시 발굴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이미 여러 성과가 도출되고 있다. 장차 지속적인 조사와 연구를 통해 지금은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백제사의 이모저모를 다시금 되살릴 수 있기를 바란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전공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