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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배는 왜 삼각돛이 없을까[김창일의 갯마을 탐구]〈104〉

입력 | 2023-11-15 23:33:00

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


캐럭, 캐러벨, 갤리언 등 대양을 가로지르며 신항로를 찾던 배들로 가득했다. 아메리카 항로를 개척한 콜럼버스가 1492년 첫 항해에서 타고 간 산타마리아호, 인도 항로를 찾아낸 바스쿠 다 가마가 1497년 탔던 상 가브리엘호, 세계 일주를 한 마젤란 함대의 함선인 빅토리아호까지 다양한 범선 모형이 도열해 있었다. 재개관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찾아간 부산 영도구에 있는 국립해양박물관 상설전시실에서 마주한 광경이다.

대항해시대(15∼17세기)는 유럽인들이 항해술을 발전시켜 아메리카로 가는 뱃길과 인도와 동아시아로 가는 신항로를 개척하던 시대를 일컫는다. 존재 자체도 알지 못하던 다른 문명권과 연결돼 서로의 존재를 인식한 시기다. 대항해시대를 열게 된 역사적 배경으로 후추를 들 수 있고, 나중에는 금, 은, 노예, 설탕 등이 중요한 교역품으로 떠올랐다. 인류의 세계관 확장과 대양 무역의 활성화 이면에는 식민지 개척이라는 어두운 역사도 상존한다.

범선 무역을 보여주는 전시 관람 후 동선을 따라 이동하면 조선의 선박이 진열돼 있다. 조운선, 판옥선, 거북선을 보다가 불현듯 ‘조선의 배는 삼각돛이 없었구나’라는 생각이 스쳤다. 직전에 삼각돛을 달고 대양을 항해하던 범선의 잔영이 짙게 남은 영향일 터. 먼바다를 건널 수 있었던 중요한 기술적 배경에는 나침반과 함께 삼각돛을 들 수가 있다. 뒤쪽에서 부는 바람에 의해 앞으로 나아가는 범선은 역풍이 불면 돛을 접어야 했으나, 삼각돛을 달면서 맞바람에도 전진할 수 있게 됐다. 대항해시대는 삼각돛이 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삼각돛이 이 땅에 전해지지 않은 이유는 뭘까. 조선은 바다를 경시했고, 타 문명과의 접촉은 중국과 일본을 통하는 정도였다. 세계 문명에 대한 인식은 해상교역이 활발하던 고려시대에 미치지 못할 정도로 후퇴했다. 고려는 바닷길로 송나라와 유구국 및 일본, 동남아시아, 서역까지 교류했다. 고려와 달리 조선은 통신사의 일본 파견과 청이 요동을 점령한 17세기 초에 잠깐 해로를 이용한 정도에 그쳤다.

얼마 전 전남 해남군 송지면의 송지해수욕장 해역에서 고선박 한 척이 발견됐다. 방사성탄소 연대를 분석해보니 11세기 초반∼12세기 중반께로 연대 추정치가 나왔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최대 길이 13.4m, 최대 폭 4.7m로 추정했다. 현재까지 한반도에서 발견된 15척의 고선박 중에서 가장 큰 규모라고 했다. 보도된 자료를 읽으면서 지금까지 발견된 고선박이 15척이라는 점에 주목했다. 15척의 고선박 중에서 고려시대가 11척인 것에 반해 조선시대는 1척에 불과하다. 해상 운송이 활발했던 시대가 언제였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방증이 아닐까.

18세기 전까지 조선은 도서 지역 거주민을 본토로 이주시켜 섬을 비우는 쇄환정책으로 일관했다. 방어와 중앙집권제에 섬이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봤다. 세종 19년(1437년 5월 1일), 호조는 경상, 전라, 충청, 황해도 백성이 앞다퉈 청어를 잡아 큰 이득을 얻는데 방치하면 백성들이 농사를 포기하고 바다로 나갈지도 모른다고 상소했다. 조선 사회가 바다를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바다를 경시함으로써 세계의 흐름에서 뒤처진 조선은 삼각돛의 필요성조차 깨닫지 못한 사회였는지 모른다는 상념에 잠겨 전시실을 빠져나왔다.



김창일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