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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잃고 지혜 얻은 크로이소스, 그의 삶은 비극인가[조대호 신화의 땅에서 만난 그리스 사상]

입력 | 2023-11-16 23:33:00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헤로도토스. 학문적 역사 서술을 지향한 투키디데스와 달리 헤로도토스는 다채로운 서사를 보여주는 이야기꾼이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역사는 이야기다.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는 엄숙한 역사학자가 아니라 세상 곳곳을 떠돌며 보고 들은 것을 전하는 이야기꾼이었다. 그가 쓴 ‘역사’의 중심에는 ‘페르시아 전쟁’이 있지만 이 전쟁 이야기의 주변에는 수많은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학문적 역사 서술을 지향한 투키디데스와 다른 점이다. 헤로도토스는 신화들, 여러 민족의 이야기들, 지리학적 기록들, 인간의 본성에 대한 통찰 등을 섞어 ‘역사’의 다채로운 서사를 끌어가는데,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의 이야기가 그런 특징을 잘 보여준다. 그것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믿었던 한 사내의 이야기이다.》










‘아테나이의 현자’ 솔론의 경고

리디아 왕국의 왕 크로이소스(모자 쓴 인물)가 아테나이의 현자 솔론에게 보물을 자랑하는 모습을 그린 벨기에 출신 화가 프란스 프랑컨 2세의 그림 일부. 자신의 행복을 과시하려는 크로이소스에게 솔론은 인생의 변화무쌍함을 경고한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아테나이의 현자 솔론을 만났을 때 크로이소스에게는 자랑거리가 많았다. 정복전쟁을 통해 얻은 거대한 제국 리디아가 그의 소유였고, 수도 사르데이스의 창고는 보물로 가득 찼다. 슬하에 두 아들도 있었다. 누구에게나 부러움을 살 만했다. 세상 이곳저곳을 돌아다닌 솔론이 왕궁을 방문하자 그는 이 현자에게 자신의 행복을 확인받고 싶었다. “아테나이인 빈객이여, 우리는 당신의 지혜와 여행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소. … 이제 나는 그대가 정말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행복한 자를 만난 적이 있는지 간절히 묻고 싶소.”(‘역사’·김봉철 옮김)

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

솔론은 냉정했다. 부유한 권력자의 간절한 질문을 무시하듯, 그는 죽은 이들의 ‘행복’ 이야기로 말을 돌렸다. 훌륭한 자식들과 손자들을 두고 전장에서 장렬히 전사한 왕, 어머니를 축제에 모셔가기 위해 소들 대신 우마차를 끌다가 힘에 부쳐 죽은 두 아들…. “그렇다면 산 자들 가운데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구인가?” 짜증이 난 크로이소스가 다그쳐 묻자 현자가 다시 대답했다. “크로이소스여, 인간은 전적으로 우연한 존재입니다. 지금 제가 보기에 전하께서는 대단히 부유하시고 많은 사람들의 왕이십니다. 그러나 저는 전하께서 유복하게 생을 마감하셨다는 말을 듣기 전에는 전하께서 저에게 물으신 그 질문에 답할 수 없습니다. 대부호라고 해도, 행운이 그를 잘 보살펴 결국 그가 온갖 좋은 것을 다 누리며 삶을 잘 마감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는 하루 벌어 사는 자보다 더 행복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크로이소스는 기가 찼다. 하지만 솔론은 감언이설로 헛된 희망을 부추겨 권력자를 미혹하는 점쟁이가 아니었다. 그는 ‘어떤 현자도 미래를 알 수 없다는 것을 아는 현자’였으니까. 그런 현자가 자만에 빠진 왕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인생의 불확실함과 우연성에 대한 경고뿐이었다. 그런 경고가 예언이 되리라는 사실은 아마 솔론 자신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페르시아 원정, 과신이 몰락 불러

크로이소스가 금과 은으로 주조한 주화.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솔론의 경고는 크로이소스의 아들 아튀스의 죽음과 함께 현실이 되었다. 어느 날 그는 후계자로 점지된 아들이 창에 찔려 죽는 꿈을 꾸었다. 그러자 서둘러 아들을 혼인시키고 전쟁 출전을 막았다. 아들의 처소에서 창칼을 모두 치웠다. 그래도 ‘운명의 창’은 피할 수 없었다. 갑자기 나타나 이웃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든 멧돼지 사냥에 아들을 보낸 것이 화근이었다. 사냥에 나가겠다는 아들의 말을 들었을 때 그는 무기 없는 짐승이 아들을 죽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사냥에 참여했던 동료 아드레스토스가 던진 창이 과녁에서 빗나가 아들을 맞힐 줄 누가 알았을까?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크로이소스는 두 해 동안 슬픔에 젖어 있었다. 그 깊은 슬픔에서 그를 끌어낸 것은 페르시아 제국의 위협이었다. 두 제국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지정학적 운명이었다. 크로이소스의 리디아가 소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고 있을 무렵 동쪽에서는 키로스가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하고 세력을 넓혀 가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패기만만한 동방의 제국이 서쪽의 왕국들을 정복해 가는 ‘동세서점’의 형국이었다.

물론 크로이소스는 두려움에 떨며 전쟁을 회피할 겁쟁이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자신감이 있었다. 페르시아 제국이 더 커지기 전에 선제공격이 필요하지 않을까? 고민에 빠진 크로이소스는 결정을 내리기 전 신탁에 조회했다. 그는 영험하기로 소문난 델포이 신탁소에 사절을 보내 개전 여부에 대해 물었다. “크로이소스가 강을 건너면 큰 나라를 멸망시킬 것이다.” 신탁이 지목한 강은 리디아의 동쪽 국경을 흐르는 할리스강이었다. 신탁을 들은 크로이소스는 주저 없이 강을 건너 전쟁에 나섰다. 신탁이 예언한 ‘큰 나라’가 어디인지 되묻지 않은 채….

그런 과신이 몰락을 불렀다. 처음에 크로이소스는 승리하는 것 같았다. 페르시아 제국의 도시를 함락하기도 했다. 하지만 크로이소스와 그의 동맹군들은 키로스의 예상치 못한 반격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사르데이스가 함락되고 왕은 포로로 잡혔다. 또 어떤 우연이 추락한 왕을 기다리고 있었을까?

헤로도토스는 다시 솔론과의 대화를 상기시키는 일화로 돌아간다. 키로스 앞에 화형장이 준비되고 크로이소스가 그 위에 올랐다. 그런데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하자 그가 세 번 외쳤다. ‘솔론! 솔론! 솔론!’ 느닷없는 외침에 키로스도 궁금해졌다. 그는 사정을 알아보게 했고, 통역이 자초지종을 전하자 마음을 바꿔 화형을 중지시켰다. “그는 자신도 인간이면서 자신 못지않게 유복했던 다른 인간을 산 채로 불태우려 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는 응보가 두려웠고 인간사에서는 그 어느 것도 확실한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키로스는 크로이소스의 운명이 곧 자신의 운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솔론의 지혜가 결국 두 제국의 왕을 살려낸 셈이다.





잘 풀릴 때 최악을 대비해야

그리스인들은 바다에서 인생을 배웠다. 누구나 각자의 방식으로 거친 바다를 건너지만 항해 중 어떤 일이 어떻게 닥칠지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바다가 삶의 터전이었던 그리스인들에게는 안전한 항해를 위해서 인간이 대비할 수 있는 것과 운에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을 구별하는 것이야말로 지혜의 근본이었다. 변덕스러운 바다에서 배의 돛과 닻줄을 튼튼히 하고 키를 올바른 방향에 맞추는 것 말고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대체 무엇일까? 그리스 철학자들이 행운에서도, 역경에서도 변함없는 삶의 태도를 윤리적 삶의 이상으로 여긴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크로이소스 이야기 속 반전은 끝나지 않았다. 키로스의 가신이 된 크로이소스는 왕이 이웃 나라와의 전쟁 방법을 놓고 고민하고 있을 때 이런 조언으로 그를 도왔다고 한다. “전하와 전하께서 지배하는 다른 자들이 모두 한낱 인간이라는 점을 알고 계신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지사(人間之事)는 수레바퀴처럼 돌고 도는 것이어서 같은 사람이 계속 행운을 누리게 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통촉하시옵소서.” 권력과 부가 주지 못했던 지혜를 크로이소스는 추락을 통해서 얻었다. 그의 삶은 비극적인가?






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