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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니 글러브가 보여준 ‘어른스러움’[특파원칼럼/이상훈]

입력 | 2023-11-21 23:45:00

6만 개 전국 초등교 기증에 들뜬 日 어린이들
잔소리 대신 행동으로 감동 주는 모습 배워야



이상훈 도쿄 특파원


요즘 일본 초등학교 최대 화제는 단연 ‘오타니 글러브’다.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 슈퍼스타 오타니 쇼헤이(29·LA 에인절스)가 전국 모든 초등학교에 야구 글러브를 기증하기로 하면서다. 출신교나 고향에 운동용품을 기부하는 프로 선수는 많아도 전국 모든 학교에 기증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일본 2만여 초등학교에 기증하는 글러브는 총 6만 개다. 학교마다 오른손잡이용 2개, 왼손잡이용 1개 등 3개를 보낸다. 1개당 1만 엔으로 계산하면 모두 6억 엔, 우리 돈으로 52억 원이 넘는다. 시판되지 않는 특별 제작 글러브다. 일본 초등학교가 아니면 볼 수도, 구할 수도 없는 ‘레어템(희귀 물품)’이다.

글러브 준비, 제작, 배송 등을 고려하면 내년 3월에나 전달이 끝날 것으로 보이지만 아이들은 벌써 들떠 있다.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꼭 손에 껴 보고 싶어요” “오타니 글러브로 야구 하고 싶어요”. 일본 지역 언론이 소개하는 초등학생들의 생생한 목소리다.

학교마다 오타니 글러브를 어떻게 쓸지 행복한 고민을 하고 있다. 체육 수업 시간에 쓰겠다는 학교, 모든 학생에게 만져 볼 기회를 주겠다는 학교, 기부의 소중함을 가르치는 도구로 쓰겠다는 학교 등 아이디어는 제각각이지만 두 번 다시 받기 힘든 선물인 만큼 어떻게든 최선의 방식으로 교육에 활용하겠다는 방침은 다르지 않다.

일본은 한국보다 체육 수업이 많고 생활 스포츠도 활성화돼 있지만 최근에는 아이들이 체육에서 관심이 멀어져 고민이 많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 이후 몸을 움직이는 습관을 잃어버렸다는 지적도 나온다. 일본 스포츠청에 따르면 전체 학생 가운데 비만 학생 비율은 2013년 9.9%에서 지난해 14.5%로 급증했다. 10년 전 6분 35초 수준이던 중학생 1500m 달리기 평균 기록은 10년 새 20초가량 느려졌다. 저출산 장기화로 1980년 2만8000여 개에 달했던 초등학생 야구팀은 지난해 1만 개 밑으로 줄었다.

방에서 컴퓨터 게임에 빠진 아이들에게 운동에 대한 흥미를 붙여주기 위해 한국 일본 모두 고민하지만 딱 부러지는 대책은 보이지 않는다. 정부는 효과도 뚜렷하지 않은 관성화된 대책을 반복하기 바쁘고 정치권은 ‘어린이 체력 향상’처럼 당장 표가 되지 않는 정책에는 별 관심이 없다. 언론은 현장의 목소리를 담은 문제점은 이따금 지적하지만 해결책 제시에는 약하다.

오타니는 달랐다. “너희들 왜 운동 안 해?” “게임만 하면 눈 나빠지고 뚱뚱해져” 같은 잔소리는 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면 일본 야구와 스포츠계가 발전할지 거창한 담론을 얘기하지도 않았다. 그저 “야구 하자”고 외치며 초등학교에 글러브를 나눠주는 통 큰 실천을 했다. “다음 세대에게 꿈과 용기를 심어주고 싶다”는 소감이 빈말이 아니라는 걸 행동으로 보여줬다.

세계 최고 슈퍼스타가 야구를 권하며 글러브를 건네니 아이들이 흥미를 갖고 운동장으로 뛰어나가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걸로 아이들 문제가 모두 해결될 순 없겠지만 10년 뒤 일본 청년 중 누군가는 “오타니 글러브로 야구를 하면서 인생이 바뀌었다”고 말하게 되지 않을까.

비판과 잔소리 대신 행동으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만큼 어른스러움은 없다. 올 3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결승전을 앞두고 “미국(선수들)을 동경하면 넘어설 수 없다. 오늘 하루만큼은 동경하는 마음을 버리자”며 상대에 대한 존경과 투쟁심을 함께 보여준 오타니다. 최고 자리에서 동료에게는 자신감을, 후배에게는 동기를 부여하는 모습을 한국 사회 지도층에게 기대하고 싶다.




이상훈 도쿄 특파원 sanghu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