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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마는 억압받는 여인의 깃발”… 1세대 실험미술가 정강자 개인전

입력 | 2023-11-23 03:00:00

‘나를 다시 부른 것은 원시였다’展 내달 30일까지
도형 단순화 인체형상 작품 등 전시



정강자의 1995∼1996년 작품 ‘뜨개질로 우주를’. 아라리오갤러리 서울 제공


1968년 5월 30일, 정강자 작가(1942∼2017)는 음악감상실 ‘쎄시봉’에서 정찬승, 강국진 작가와 ‘투명풍선과 누드’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이 퍼포먼스로 그는 ‘1세대 실험미술가’로 기록되지만, 당시엔 ‘퇴폐미술’이라며 손가락질을 받았다. 1970년 국립공보관에서 연 첫 개인전 ‘무체전(無體展)’은 사회 비판 요소가 있다며 강제로 철거당했다. 이후 정강자는 가족과 함께 싱가포르로 떠났다.

정강자는 싱가포르에서도 인도네시아 염색 기법인 ‘바틱’을 접목한 작품을 제작하는 등 꾸준히 작업을 해나갔다. 1980년대 초에는 귀국해 미술학원을 운영하면서 낮에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그림을 그렸다. 서울 종로구 ‘아라리오갤러리 서울’은 정강자의 1995∼2010년 작품 40점을 선보이는 개인전 ‘나를 다시 부른 것은 원시였다’를 다음 달 30일까지 연다.

전시 제목은 정강자가 일기에 적었던 문구다. 그는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까지 중남미, 아프리카, 서남아시아, 남태평양 등을 2∼3개월씩 홀로 여행했고, 당시 봤던 이국적인 풍경과 인물을 나중에 화폭에 담았다. 갤러리 지하 1층에 전시된 ‘거미’, ‘뜨개질로 우주를’ 등에선 풍부한 원색과 상상력이 드러난다.

갤러리 1층에 전시된 1990년대 후반 작품에선 한복을 비롯한 전통 소재에 대한 관심을 볼 수 있다. ‘유한한 인생’에선 한복 치마가 산처럼 우뚝 서 있는 모습을 묘사했다. 정강자는 한복 치마를 “수천 년을 남성우월주의의 지배에서 억압받은 우리 여인들의 깃발이며, 어머니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이라고 작가 노트에 적었다. 여성 예술가로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3, 4층엔 2000년대 작품이 전시됐다. 원색의 풍경을 배경으로 기하학적 도형으로 단순화된 인체 형상이 나타난다. ‘숲에서의 오수’, ‘숲속을 부유하는 여인’처럼 자연을 배경으로 내면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작품들이다. 강소정 아라리오갤러리 디렉터는 “작고 직전까지 작업에 전념했던 정강자는 화면 속 무한한 자유의 공간에서 펼쳐낸 상상을 통해 스스로를 해방시키고자 했다”고 말했다. 무료.


김민 기자 kim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