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현지 시간) 이집트 카이로 도심의 한 건물에 다음 달 대선에서 3선을 노리는 압둘팟타흐 시시 대통령의 대형 홍보물이 걸려 있다. 이번 선거에는 시시 대통령 외에도 3명의 후보가 출마했지만 이들의 선거 홍보물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사실상 다음 달 대선이 시시 대통령의 3선을 위한 요식 행위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카이로=김기윤 특파원 pep@donga.com
김기윤 카이로 특파원
《“대선 투표요? 결과가 뻔한데 뭐하러 투표를 해요. 저 말고도 투표하지 않겠다는 사람이 상당히 많습니다.”
19일(현지 시간)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서 만난 시민 A 씨는 다음 달 10∼12일 치러지는 대선 때 투표할 의향이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냉소적으로 답했다. 2014년부터 집권 중인 압둘팟타흐 시시 대통령(69)의 3선이 사실상 확정적이며 선거는 요식 행위에 불과한데 왜 투표를 하겠느냐는 취지의 답변이었다. 그 와중에 A 씨는 기자에게 “이름을 절대 알려주지 않겠다”며 반대파 탄압으로 유명한 시시 정권을 두려워하는 모습도 보였다.》
최근 이집트 전역에는 시시 대통령의 얼굴이 등장한 대형 포스터, 전광판, 플래카드 등이 가득하다. 시시 대통령을 비롯해 총 4명의 후보가 나섰음에도 그를 제외한 나머지 세 후보의 홍보물은 찾아보기 어렵다. A 씨 같은 시민들이 “나머지 후보 3명은 구색 갖추기용 들러리에 불과하며 사실상 1인 후보가 출마한 선거”라고 꼬집는 것도 이 때문이다.
만성적인 경제난과 외환보유액 부족에 시달리는 이집트는 지난해 말 국제통화기금(IMF)에 30억 달러(약 3조9000억 원)의 구제금융을 받을 정도로 경제 상황이 좋지 않다. 돈을 빌린 후에도 고물가, 통화가치 하락, 빈곤율 증가 등이 이어지자 시시 대통령의 인기 또한 떨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민심 이반을 막으려는 시시 정권이 잠시 ‘국면 전환’을 해 보려고 조기 대선 카드를 꺼냈다는 비판이 가득하다.
국가 신용등급 하향 러시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무디스, 피치 등 세계 3대 신용평가사는 최근 잇달아 이집트의 국가 신용등급을 하향하고 있다. 등급 하향 전에도 3대 신평사 모두 ‘투자 부적격’ 등급을 부여했지만 그 와중에도 더 나빠졌다.지난달 무디스가 가장 먼저 ‘B3’에서 ‘Caa1’로 낮췄다. 직후 S&P도 ‘B’에서 ‘B―’로 강등했다. 이달 초 피치 또한 ‘B’에서 ‘B―’로 낮추며 하향 대열에 합류했다. 피치 측은 “대외 자금 조달 능력, 거시경제 안정성, 정부 부채 상태 등이 모두 위험하다”고 이유를 밝혔다.
이집트의 경제난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과 우크라이나 전쟁 등을 거치며 본격화했다. 우선 코로나19로 핵심 산업인 관광업이 큰 타격을 입었다. 밀 등 우크라이나산 곡물 의존도가 높은 상황에서 전쟁으로 주식인 빵 가격이 치솟은 것도 악영향을 끼쳤다.
구제금융으로 간신히 연명하고 있지만 IMF가 요구하는 경제 구조 개혁은 지지부진하다. IMF는 돈을 빌려주는 대가로 변동 환율제 도입을 요구했다. 경제난을 반영해 미 달러화에 대한 이집트파운드 가치가 떨어져도 사실 그대로 반영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시시 정권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인위적으로 달러당 31이집트파운드로 고정하고 있다. 꼼수로 통화가치 하락을 막아놨지만 암시장에서는 45파운드에 거래될 정도로 실제 화폐 가치와 고시 환율과의 괴리가 심하다. 통화가치 하락으로 수입 물가가 상승하면서 서민 생활고 또한 가중되고 있다.
‘21세기 파라오’ 노리는 시시
이집트는 겉으로 보면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군인 출신인 시시 대통령은 집권 내내 반대파를 탄압하고 언론을 장악하는 권위주의 통치로 일관하고 있다. 당초 이번 대선에서의 출마가 유력했던 몇몇 인사는 출마 기회 자체를 봉쇄당했다. 시시 정권이 야권 인사의 휴대전화를 해킹하는 일도 다반사다.특히 시시 대통령은 2019년 개헌을 통해 대통령 임기를 기존 4년에서 6년으로 늘려놓은 상태다. 이로 인해 다음 달 대선에서 3선에 성공하면 76세가 되는 2030년까지 집권이 가능하다. ‘현대판 파라오(고대 이집트의 통치자)의 탄생’ ‘노골적인 종신 집권 시도’라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대학생 아슈라프 씨(21)는 “이번 대선에서도 시시 대통령이 90% 이상의 득표율을 손쉽게 얻을 것”이라고 했다.
2011년 ‘아랍의 봄’ 민주화 운동으로 수십 년간 철권통치를 폈던 호스니 무바라크 전 대통령이 물러났다. 이후 최초의 민선 지도자인 무함마드 무르시 전 대통령이 집권했을 때만 해도 이집트에도 서구식 민주주의가 꽃필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무르시 전 대통령은 이슬람 원리주의에 기반한 신정일치 국가 건설을 꿈꾸는 ‘무슬림형제단’이란 조직의 지지로 정권을 잡았기에 21세기 현대 사회와 맞지 않는 극단적인 이슬람 보수주의 정책을 폈다. 무르시 정권은 종교나 국적에 관계없이 모든 여성에게 히잡 착용을 의무화하려 했다. 또 이슬람 외의 다른 종교를 철저히 탄압했다. 이에 대한 사회 전반의 반감으로 무르시 전 대통령은 집권 1년 만에 축출됐다. 이후 권좌에 오른 사람이 바로 시시 대통령이다.
이집트 사회 전반에는 시시 정권이 비록 독재는 할지언정 광신에 가까운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을 제어해 주고 세속주의를 보장해 주기 때문에 그나마 낫다는 평가 또한 만만치 않게 존재한다. 실제 시시 대통령은 집권 후 무르시 정권 때의 각종 여성 억압 정책을 무효화했다. 이집트의 토착 기독교 종파인 콥트 정교회에도 포용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스라엘과의 관계도 나쁘지 않았다.
중동전쟁에 복잡한 속내
다만 시시 대통령이 다음 달 대선에서 3선에 성공한다 해도 경제난, 중동전쟁 여파 등으로 그의 3기가 순탄하지는 않을 것이란 의견이 지배적이다.잘 알려진 대로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는 무슬림형제단의 팔레스타인 지부에서 출범했다. 하마스 또한 무슬림형제단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모든 행위를 ‘성전(聖戰)’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팔레스타인은 물론이고 이스라엘 땅에도 이슬람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고 외친다.
시시 대통령은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전쟁 발발 후 다른 아랍국과 함께 이스라엘을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하마스의 근거지인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난민을 받아들이는 것은 결사반대하고 있다. 자국 경제난이 심각한 상황이라 가자지구 주민을 도와줄 여력이 없고, 일반 난민 속에 하마스 대원이 섞여 들어와 이집트 땅에서 테러 등을 벌일 위험 또한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랍의 봄’ 이후 이집트 상황△ 2011년 ‘아랍의 봄’ 민주화 운동, 독재자 호스니 무바라크 축출
△ 2012년 무함마드 무르시, 첫 민선 대통령 취임
△ 2013년 쿠데타로 무르시 축출
△ 2014년 압둘팟타흐 시시 대통령, 집권 시작
△ 2018년 시시 대통령, 재선
△ 2019년 시시 대통령, 임기 늘리는 개헌 단행
△ 2022년 국제통화기금(IMF)에서 30억 달러 구제금융
△ 2023년 12월 10∼12일 대선
김기윤 카이로 특파원 pe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