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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세 역풍, 차관 3명 낙마, 물가상승… 3연타에 지지율 ‘퇴진 수준’ [글로벌 포커스]

입력 | 2023-11-25 01:40:00

끝 모를 지지율 하락, 기로에 선 기시다 日총리
출범 때 지지율 45%→20%대 추락… 외교로 올린 지지율, 내정으로 반토막
“언제 물러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30년 만의 고물가에 국민부담 가중… 돈 들어갈 곳 많은데 재원 대책 모호
“기시다 고유 색깔 안 보여” 지적도




올해 5월 17일 일본 도쿄 국회의사당 인근의 한 특급 호텔. 히로시마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를 이틀 앞두고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일본 총리가 수장을 맡은 집권 자민당의 ‘기시다파’ 파벌인 고치카이(宏池会)가 대규모 정치자금 모금 행사를 했다.

자민당 내 4위 파벌이지만 총리가 몸 담고 있는 파벌답게 행사는 화려하게 진행됐다. 기시다 총리의 라이벌이자 자민당에서 중심 역할을 하는 모테기 도시미쓰(茂木敏充) 간사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우리는) 선거에 강하다. 지금 일본은 선진국에서 가장 안정적인 정권 기반을 갖고 있다.” 인사말이 끝나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G7 정상회의 개최로 지지율이 반등한 기시다 총리에 대한 덕담이자 집권 여당의 지위는 영원할 것이라는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하지만 불과 6개월이 지난 이달 21일, 자민당 당사 기자회견장에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당 회의를 마친 모리야마 히로시(森山裕) 총무회장은 굳은 표정으로 마이크 앞에 섰다.

“굉장한 위기의식을 갖고 있다. 비리나 실언 등이 있으면 국민 실망은 깊어질 수밖에 없다. 당력을 모아 총리를 지지하고 신뢰 회복에 집중하는 게 중요하다.”

‘선진국에서 가장 안정적인 정권’이라고 자부했던 일본에서 총리 퇴진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언제 물러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기시다 비판이 유행이 됐다” “야당에 정권을 내준 2009년과 닮아 있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다. 최근 일본 언론 조사 결과 지지율은 21%까지 곤두박질쳤다. 대체 반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기시다 총리는 퇴진 위기에 몰릴 정도로 지지율이 추락했을까. 올 상반기처럼 기시다 총리는 다시 한번 지지율 반등을 노릴 수 있을까.

● 외교로 끌어올린 지지율, 내정으로 하락

2021년 10월 취임 당시 45% 안팎의 지지율로 시작한 기시다 정권은 지난해 7월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가 피살되고 곧바로 치러진 참의원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면서 지지율이 정점에 올랐다.

탄탄대로일 것 같던 기시다 정권은 지난해 가을 자민당과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옛 통일교)의 유착 의혹이 불거지면서 꺾이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서 별다른 여론 수렴 없이 아베 전 총리 국장(國葬) 실시를 전격 결정하면서 국민 반발도 커졌다. 각종 스캔들까지 겹쳐 각료 4명이 낙마하면서 기시다 총리의 책임론이 불거졌다.

하락세를 보이던 기시다 정권의 지지율은 올 상반기에 반등했다. 한국 정부가 3월 대법원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문제 해결책을 발표해 한일 관계가 개선된 것도 그 요인 중 하나였다. 우크라이나 방문, G7 정상회의 개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방일 등이 이어지며 ‘외교의 기시다’라는 평가가 나왔다. G7 정상회의 때 세계 정상들을 불러모아 글로벌 외교를 이끌어가는 듯한 모습을 연출한 게 지지율 반등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외교로 끌어올린 지지율은 내정(內政)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는 디지털 전환 핵심 과제로 한국의 주민등록증과 유사한 ‘마이넘버 카드’ 보급을 추진해 왔는데 동명이인에게 엉뚱한 카드가 발급되거나 자신의 카드에 다른 사람 개인정보가 입력된 사례가 속속 나왔다. 50%를 넘겼던 지지율은 1개월 만에 30%대로 추락했다. 종이로 된 건강보험증을 내년 가을까지 폐지하고 마이넘버 카드에 통합하겠다고 하자 국민 불만은 더욱 커졌다.

한번 시작된 지지율 하락에는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았다. 이달 초 국민 부담을 덜어주겠다며 소득세 4만 엔(약 35만 원) 감세, 저소득층 7만 엔(약 61만 원) 지급을 발표했지만 되레 역풍이 불었다. 보궐선거를 불과 이틀 앞두고 전격 발표된 감세 정책에 야당은 격렬하게 반발했고 국민도 어리둥절했다.

당내에서조차 “지금 감세를 생각하고 내년에 방위비 증세를 한다는 것은 국민이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하기우다 고이치·萩生田光一 자민당 정무조사회장) “1년 한정으로 세금을 국민에게 환원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이상하다”(자민당 전직 장관) 등의 말이 나왔다. 아사히신문의 이달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76%는 감세 보조금 정책에 대해 “정권 인기 부양용”이라고 응답했다.

여기에 차관급 인사 3명의 낙마는 지지율 하락에 기름을 부었다. 교육을 담당하는 문부과학성 정무관이 불륜으로, 법 집행을 담당하는 법무성 부대신은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나라 살림을 총괄하는 재무성 부대신은 세금 체납으로 3주 새 차례로 사임했다. 특히 이들 차관이 직무와 관련된 문제로 퇴진하면서 기시다 총리가 말해온 ‘적재적소 인사’는 공수표가 됐다. 또한 자민당 주요 5개 파벌이 정치자금 보고서에 정치자금을 축소 신고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도쿄지검 특수부가 수사에 나서면서 추가 악재로 부상했다.

● 물가 인상 등 경제난에 비판 확산

기시다 정권의 인기 하락에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경제 문제가 가장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야지마 야스히데(矢嶋康次) 닛세이기초연구소 수석이코노미스트(상무)는 이렇게 말한다.

“성장률이 높아졌고 경기는 좋다지만 30년 만에 물가 상승을 체험하면서 이제까지 겪어 보지 못한 어려움이 커졌다. 특히 중소기업과 고령자, 저소득층의 생활이 힘들어졌다. 그 와중에 소득세 감세를 하겠다면서 방위비 증세, 연금보험료 인상도 함께 실시한다니 ‘대체 뭘 하고 있는 것이냐’ ‘나라가 어디로 가는 것이냐’는 불만이 증폭되고 있다.”

민주당 정권 때 총리를 지낸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의원은 최근 국회에서 기시다 정권의 ‘오락가락 경제정책’을 이렇게 혹평했다.

“기시다 가게라는 음식점에 들어갔는데, 메뉴판을 보니 가격은 없고 전부 ‘시가(時價)’라고만 쓰여 있다. 저출산 지원, 방위비 증액 등 돈 들어갈 곳은 많은데 재원 대책이 없으니 국민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

기시다 정권의 고유한 색깔이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도 크다. 마쓰다 교헤이(松田京平) 아사히신문 정치부장은 “기시다 총리의 속내, 본심에 대해 국민들이 의문을 갖고 있다”며 이같이 분석했다.

“아베 전 총리는 우파의 강한 지지를 받으면서 관료를 강하게 통제했다. 이것이 개혁 이미지로 연결됐다. 북방영토 반환 추진, 도널드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과의 골프 등도 비판은 있었지만 자신의 방식으로 정책을 추진했다. 하지만 기시다 총리는 무슨 정책을 추진하려는 것인지, 어떤 개혁을 지향하고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러시아, 중국, 북한에 대해 무엇을 할지, 기시다 총리가 중심이 돼 할 수 있는지가 안 보인다. 총리에 재선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는 계속 생각하는 것 같은데 국민들은 (그런 속내를) 꿰뚫어 보고 있다.”

기시다 총리가 몸담고 있는 고치카이는 자민당 내 ‘보수 본류’로 전통적으로 평화헌법 유지, 대미 협력외교, 경제 성장 중시 등을 추구한다. 기시다 총리 취임 당시 아베 전 총리가 중심이 된 보수 강경 일변의 정책 노선에 변화를 줄 것이라는 기대가 없지 않았다. 하지만 소수 파벌의 한계로 이렇다 할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렇다고 보수층의 염원인 헌법 개정 등을 강하게 추진했던 것도 아니다. 그러다가 최근 지지율이 떨어지자 기시다 총리는 개헌, 왕위 계승 방안 검토 등의 카드를 꺼냈다. 경제, 정치 모두 이런 뒷북 대응들이 누적되면서 ‘신념은 없고 권력 연장만 바라보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 “다음 총리 누구냐” 백가쟁명 논쟁

기시다 총리 지지율은 바닥을 모른 채 추락하고 있지만 정권 교체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입헌민주당, 일본유신회 등 일본 야당들의 지지율은 여전히 한 자릿수에 머물고 있다. 옛 민주당 정권 인사들이 주축인 입헌민주당은 2011년 동일본대지진 당시의 부실 대응으로 수권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인식이 지금도 강하다. 오사카를 기반으로 한 일본유신회는 극우적 색깔과 오사카 지역정당이라는 이미지가 있어 대안 세력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일본 정가와 국민들의 시선은 자민당 내에서 다음 총리가 누가 될지에 쏠리고 있다. 하지만 뚜렷한 후보군은 떠오르지 않고 있다. 주요 여론조사에서는 고이즈미 신지로(小泉進次郎) 전 환경상,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경제안보담당상, 고노 다로(河野太郎) 디지털상,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전 자민당 간사장 등이 후보군으로 꼽힌다.

하지만 이들은 뚜렷한 파벌 지지를 못 받고 있는 비주류이거나 지나치게 극단적인 노선으로 총리를 맡기에 부적절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 때문에 최근 요미우리신문 여론조사에서 차기 총리로 누가 좋겠느냐는 질문에 36%가 ‘없다’고 응답했다. 기시다 총리가 낮은 지지율로 정권을 이어가는 이른바 ‘저공 비행’이 이어질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최근 눈에 띄는 주자는 가미카와 요코(上川陽子) 외상이다. 국민적 지명도가 아직 낮고 당내에서도 ‘실무형’으로 평가받을 정도로 강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인기가 떨어진 자민당이 ‘일본 첫 여성 총리’라는 타이틀을 앞세워 지지율을 부양하는 간판으로 삼을 수 있다는 관측이 있다. 도쿄대-하버드대 출신의 학력, 당내에 적이 없는 원만한 인품, 법무상 시절 옴진리교 교주 사형 집행 결정을 내린 강단 등이 최근 새롭게 평가받고 있다. 다만 권력 투쟁 경험이 부족한 가미카와 외상이 치열한 당내 정치에서 승기를 잡을 수 있을지, 자민당 최대 파벌로 보수 강경인 아베파의 지지를 받을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도쿄=이상훈 특파원 sanghu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