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책의 향기]순간이 바꾸는 生의 페이지… 더 나은 선택이란 존재할까

입력 | 2023-11-25 01:40:00

작은 차이와 우연이 바꾸는 인생… 한 사람의 네 가지 버전 삶 풀어내
폴 오스터 작품 중 가장 방대… “이 책 쓰기 위해 평생 기다린 듯”
◇4 3 2 1 (1·2권)/폴 오스터 지음·김현우 옮김/각 808쪽·744쪽·각 2만2000원·열린책들



미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 폴 오스터.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죽음은 때로 예측할 수 없는 방법으로 부지불식간에 찾아온다. 미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저자(76)가 열네 살 때 한 소년이 그의 앞에서 벼락에 맞아 죽었다. 저자와 소년 사이의 거리는 불과 몇 발자국에 불과했다. 만약 벼락이 그를 비켜 가지 않았다면 그날이 저자 생의 마지막 날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우연히 벼락을 피했고 삶은 계속됐다. 저자는 2017년 이 책을 출간하며 영국 가디언지와 나눈 인터뷰에서 “그날 이후 나는 항상 내게 일어난 일, 그 완전한 무작위성에 대해 괴로워했다. 그날이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1954년 미국 뉴욕 자이언츠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월드시리즈 1차전에서 자이언츠 중견수 윌리 메이스가 상대 팀 타자의 타구를 잡는 모습. 공을 등지고 질주한 뒤 극적으로 캐치에 성공해 미국 야구팬 사이에서 ‘더 캐치(the catch)’라고 불리는 유명한 장면이다. 소설 ‘4 3 2 1’에서 일곱 살이던 ‘퍼거슨 1’은 인디언스가 득점할 거라고 믿었던 때 메이스의 글러브 속으로 타구가 빨려 들어가는 이 장면을 보며 “모든 가능성을 엎어버리는 순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저자의 적지 않은 소설 가운데서도 분량이 가장 방대한 이 책은 삶의 무작위성 앞에서 저자가 오랜 시간 품어온 가정(假定)을 펼쳐 보인다. 만약 그해 여름 캠프에 가지 않았다면, 만약 그해 가을 삼촌이 도박에 전 재산을 걸지 않았다면, 만약 그날 그녀와 키스하지 않았다면…. 저자는 소설에서 자신과 같은 해(1947년)에 태어난 주인공 아치 퍼거슨을 4개의 평행우주 속에 그려냈다. 퍼거슨은 어찌할 수 없는 일들과 어찌할 수 있었던 일들을 거치며, 다른 존재로 4개의 다른 버전으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그려 나간다.

소설은 퍼거슨의 유년기부터 20대까지를 연대기순으로 1∼7장으로 나누고 다시 퍼거슨이 같은 시기에 보낸 각기 다른 4가지 버전의 이야기를 각 장의 1∼4절로 나눠 펼친다. 이는 작은 선택의 차이와 삶의 우연이 겹겹이 쌓여 끝내 다른 존재로 갈라지게 되는 과정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일례로 유년 시절 ‘퍼거슨 3’의 이야기를 다룬 1장 3절의 첫 문장은 “그(퍼거슨)의 사촌 앤드루가 죽었다”로 시작한다. 이어지는 ‘퍼거슨 4’의 이야기 1장 4절은 그 나이대 퍼거슨의 가족이 더 큰 집으로 이사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 차이와 우연들이 퍼거슨 가족의 앞날을 송두리째 바꾸고, 그가 보게 될 책과 영화를 바꾸고, 그가 만날 인연을 바꾸고, 결국 그의 이야기를 바꾼다. 미국 현대사가 인물의 삶을 관통하며 예기치 못한 사건에 연루시킨다.

이토록 예측 불가능하고 돌이킬 수 없는 삶을 어떻게 살아내야 할까. 저자도 같은 고민을 한 것 같다. 자신처럼 소설을 쓰는, 자신과 가장 닮은 ‘퍼거슨 4’를 통해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오직 신만이 네가 바른 선택을 했는지 잘못된 선택을 했는지 알 수 있다는 뜻이야. 불행하게도 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절대 말해주지 않아. 신에게 편지를 쓸 수는 있지. 하지만 그건 아무 소용이 없잖아. 주소를 모르니까.” 아마도 어찌할 수 없는 일에 대해선 어찌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며 웃어넘길 수밖에 없다는 뜻이 아닐까.

책을 읽다 보면 다른 세계 속 퍼거슨들의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뒤섞인다. 각각의 이야기는 별개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마치 이야기 전체가 한 사람 앞에 놓였을지 모를 다른 삶의 갈래를 모두 펼쳐 보인 듯하다. ‘퍼거슨 4’의 말을 빌리자면 “현실은 일어날 수 있었지만 일어나지 않은 일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느낌”이다. 저자가 ‘선셋 파크’ 이후 10년 만에 낸 장편이다. 저자는 66세 때부터 3년간 쓴 이 소설을 펴내며 “이 책을 쓰기 위해 평생을 기다려온 것 같다”고 했다.



이소연 기자 always9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