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치인의 불출마 선언이 잇따르고 있다. 대선 및 상하원 의원 선거가 치러지는 내년 11월까지 1년 가까이 남았지만 벌써 38명째다. 이 중 절반은 주지사나 상원의원 등 다른 선출직에 도전하겠다지만 절반은 말 그대로 “정치를 떠난다”고 했다. 긴 연말 휴가를 마치는 1월 중에 불출마 선언이 더 나올 전망이다. 2022년과 2018년의 55명 불출마 기록이 깨질 듯하다. 상원 100명, 하원 435명 가운데 10% 정도다.
▷워싱턴에서 현역의원의 정치 포기가 주목받는 것은 손에 쥐다시피 한 재(再)당선을 포기하는 결심이어서 그렇다. 지난 20년간 90% 넘는 선거구에서 ‘재출마는 곧 당선’이었다. 미국에선 물갈이 전략공천이란 제도가 없다. 현역의원에게 별 하자가 없다면 경선에서 승리해 출마한다. 2022년 상원 선거 때 33곳에 출마한 현역의원은 전원 당선됐다. 재출마한 하원의원은 94.5%가 승리해 돌아왔다. 현역 공천 탈락이 30∼40%를 넘나드는 한국과는 비교가 안 된다.
▷현역 재당선은 TV 광고의 역할이 크다는 게 정설이다. 미국 상업 광고에선 자동차건 세탁비누건 경쟁 제품 깎아내리기가 허용된다. TV 선거광고도 마찬가지로 상대 후보 꼬집기가 넘쳐난다. 이런 TV 광고에 방송 횟수 상한선이 대체로 없다. 정치자금이 넉넉한 다선 현역의원이 TV 광고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밖에 없다. 일견 불공정한 이 제도는 미 대법원의 1976년 판례 때문에 고치기도 쉽지 않다. 대법원은 “TV 광고에 상한선을 두는 것은 ‘정치적 발언을 가로막는 것’으로, 수정헌법 1조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판시했다.
▷미 의회는 실질적 권한과 국정 참여의 명예가 존중받던 곳이다. 예산발의권도 의회에만 있고, 대통령도 의회 동의 없이는 전쟁을 치르지 못한다. 그런 미 의회가 안으로부터 흔들리고 있다. 불출마 선언을 한 하원의원은 “어린아이 칭얼거림 같아진 워싱턴 정치는 더 이상 최고의 인재를 끌어들일 만한 곳이 못 된다”고까지 평가했다. 미국 정치의 하향 평준화를 걱정하는 말인데, 우리 여의도 정치에 적용해도 낯설지 않게 느껴진다는 점이 안타깝다.
김승련 논설위원 sr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