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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의 진짜 얼굴[이은화의 미술시간]〈295〉

입력 | 2023-11-29 23:36:00


회색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재봉틀 앞에 앉은 채 잠들어 있다. 바닥에는 가위와 실패, 천 쪼가리가 떨어져 있다. 커튼 사이로 환한 빛이 들어오는데도 실내 조명등은 여전히 켜져 있다. 아마도 밤새 이러고 있었나 보다. 소녀는 대체 무엇을 위해 잠도 제대로 못 자며 재봉질을 한 걸까?

크리스티안 크로그는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사실주의 화가 중 한 명이다. 그는 가족의 바람대로 대를 이어 법학을 공부했지만 결국은 본인이 원하던 화가가 되었다. 베를린과 파리 등에서 활동하며 대도시 사회 문제에 눈뜨기 시작했고, 20대 후반부터는 노동자 계급에 대한 관심과 사회 변화에 대한 열망을 담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재봉사’(1880년·사진)는 그의 이력에 중요한 전환점이 된 초기 대표작으로 주문받은 옷을 밤새도록 재봉하다 잠이 든 소녀를 보여준다. 이 아이가 침대가 아닌 재봉틀 앞에 앉아 밤새운 이유는 딱 하나. 먹고살기 위해서다. 화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 얼마나 힘겹게 일하며 사는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벽에 걸린 흑백 사진 속 인물은 어쩌면 소녀가 부양해야 할 노동력을 상실한 가족일지도 모른다.

크로그는 직접 만났거나 들었던 가난한 재봉사들의 이야기를 그림 연작으로 제작했다. 이를 토대로 1886년 12월엔 ‘알베르틴’이라는 소설로도 출간했다. 오슬로에 사는 가난한 소녀 재봉사 알베르틴이 경찰에게 성폭행을 당한 후 생계를 위해 매춘부로 살아가는 내용이다. 소설은 출간 즉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법무부 장관의 명령으로 책들이 모두 경찰에 몰수됐다. 소설이 다룬 주제가 당시 노르웨이 사회가 받아들이기 힘든, 아니 감추고 싶은 추악한 부분이기 때문이었다.

크로그는 사실주의자였다. 사회의 어두운 면을 미화하지 않고 진솔하게 표현하고자 했다. 그래선지 그의 작품엔 가난하고 힘들지만 일상을 묵묵히 견뎌내는 보통의 사람들이 자주 등장한다. 화가에겐 그것이 사회의 진짜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이은화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