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운 경제부 차장
‘슈링크플레이션’ ‘스킴플레이션’ ‘번들플레이션’ ‘스트림플레이션’….
요즘 온갖 물가가 뛰면서 생긴 다양한 신조어들이다. 제품 용량이나 성분 함량을 줄이는 게 각각 슈링크플레이션(shrinkflation), 스킴플레이션(skimpflation)이라면 낱개보다 묶음 제품의 값을 올리는 건 번들플레이션(bundleflation)이다. 동네 마트에서 목격할 수 있는 고물가 시대의 천태만상이다. 여기에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구독료가 일제히 오르는 스트림플레이션(streamflation)까지 가세했다.
‘꼼수’ 가격 인상은 인플레이션을 잡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한국은행은 최근 발간한 보고서에서 “가격 및 임금 설정 행태의 변화가 디스인플레이션(물가 상승 둔화)을 더디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물가 상승의 주된 요인이 나라마다 다르기 때문에 인플레이션에 대한 대응은 차별화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한국의 10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3.8%(전년 대비)로 미국(3.2%)을 앞질렀다. 한미 물가 상승률이 역전된 건 2017년 8월 이후 6년 2개월 만이다. 지난해 물가 정점 이후 올 9월까지 월평균 하락 폭도 한국(0.19%포인트)이 미국(0.36%포인트), 유럽(0.57%포인트)보다 작아 물가 상승률 둔화 속도가 느린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에너지·식량 자급도가 높은 미국에 비해 한국은 대외 의존도가 높은 데다 환율 상승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동안 억누른 전기·가스료 등 공공요금 인상 압박 영향도 적지 않다. 미국에 비해 노동시장이 경직되고 시장 경쟁이 덜 치열한 한국의 경제 구조도 고물가의 원인이라는 지적이 있다.
최근 식품 가격 등을 중심으로 물가가 반등하자, 한은은 30일 기준금리를 동결하면서 올해와 내년 물가 상승률 전망치를 각각 3.6%와 2.6%로 올려 잡았다. 내년 말까지도 물가 목표인 2% 달성이 어려운 것이다. 고물가 국면이 길어지는 이른바 ‘끈적한(sticky) 인플레이션’이 본격화될 수 있다는 얘기다.
인플레는 결코 만만한 적이 아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올 9월 보고서에 따르면 1970년부터 현재까지 56개국에서 발생한 인플레이션 111건 중 64건(57.6%)만 5년 내 잡혔다. 인플레가 1년 안에 진정된 사례는 12건(10.8%)에 불과했다. IMF는 “고물가를 잡기 위해선 긴축 정책을 일관성 있게 유지하는 게 핵심”이라며 “인플레이션 완화 징후가 보인다고 섣불리 긴축 강도를 풀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대표적인 인플레 파이터인 폴 볼커 전 미 연준 의장의 회고록 제목 ‘Keeping at it(긴축 지속으로 버티기)’은 우리 통화당국도 주목해야 할 교훈 아닐까.
김상운 경제부 차장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