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압 올라가기 딱 좋다는 영화 ‘서울의 봄’을 나도 보았다. 1979년 12월 12일 군사반란의 그날,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 역할로 나온 정우성(극중 이태신)이 반란군 진압 출동을 막는 부하에게 “방패막이면 어때! 내 눈앞에서, 내 조국이 반란군한테 무너지고 있는데! 끝까지 항전하는 군인 하나 없다는 게… 그게 군대냐?” 눈을 부릅뜨는데… 눈물이 솟구치는 것이었다.
영화 ‘서울의 봄’ 장면 中. 배우 정우성(정면 오른쪽에서 두 번째)은 극중 이태신 수도경비사령관을 연기했는데, 실제 인물은 군사반란을 저지하기 위해 애썼던 장태완 수도경비사령관이다. 영화 캡처
‘서울의 봄’은 보는 이들마다 다양하게 읽히는 영화다. 혈압이 치솟았던 이유가 내겐 업(業)의 엄중함 때문이었다. “저게 국방장관이냐?”(영화에서 국방장관은 한미연합사에 몸을 피하고는 “I‘m fine, thank you. And you?” 요런다). “저게 장군이냐?” 심지어 “저게(아니, 저런 분이) 대통령이냐?” 싶어 나는 분기탱천했다.
장태완 전 수도경비사령관 실제 모습. 1995년 12월 17일 촬영된 사진으로 12.12 군사반란 고소인 자격으로 검찰 조사를 받기 위해 출석하는 모습이다. 장 전 사령관은 2010년 7월 7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동아일보DB
물론 대법원은 1997년 정승화 강제연행이 위법이라고 판단했다. 정승화가 뒤집어썼던 내란방조죄도 무죄 판결을 내놨다. 장군의 아들 정홍열은 2002년 부친이 세상을 떠난 뒤 나온 자서전 ‘대한민국 군인 정승화’ 발간사 첫머리에 “나는 어제도 군인이었고, 오늘도 내일도 군인일 따름이다”라는 장군의 발언을 소개했다(공교롭게도 1979년 10월 28일 새벽에 전화로 들은 얘기란다). 책 속에는 ‘청와대나 정보부, 보안사 등만 뺑뺑 돌면서 진급은 제일 먼저 하는 군인은 군인도 아니다. 예편시켜야 한다’는 내용도 있다. 바로 그 군인도 아닌 군인들, 하나회 우두머리 전두환을 12월 13일 좌천시키려다 하루 앞서 강제연행 당한 것이 12·12 쿠데타였다.
시사인이 2016년 12월 공개한 장태완의 ‘12·12전후 10시간의 기록’에 따르면, 79년 12월 13일 오전 3시경 반란군 부대가 서울을 완전 장악한 다음에야 그는 애타게 찾던 국방장관의 전화를 받는다. 장관의 첫마디는 “장태완! 너는 왜 자꾸 싸우려고만 하나?”였다. 그러더니 “부대를 철수시키고 상황을 끝내! 내 지시를 따라!”하곤 끊더라는 거다.
극중 ‘전두광’이라는 인물을 연기한 배우 황정민(왼쪽). 오른쪽은 전두환이 2009년 8월 김대중 전 대통령이 폐렴으로 입원한 신촌세브란스병원을 찾았다 언론 카메라에 잡힌 모습. 동아일보DB
그러고도 최규하는 12·12가 일단락된 다음 날 공화당 총재 김종필에게 전화를 걸어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총재님이십니까? 저 어젯밤에 죽을 뻔 했시유!”(김종필 증언록2).
“여기 대령 이하 잘 들어라. 니들 솔직히 서울대 갈 실력 됐잖아? 근데 왜 육사 왔어? 다 집에 돈 없고 빽 없어서 먹이고 재워 주는 육사 온 거 아니야? 근데 여까지 와가 저딴 똥별 새끼들 때문에 옷 벗으면 느그들 억울해 안 해? 눈까리 똑바로 쳐들고 들으라고! 억울해 안 해?!! 그러니까 대한민국 군대 한 번 대차게 바꿔보자는 거 아니야!”(그래서 김충식의 ‘남산의 부장들’에 따르면 당시 주미대사관에 근무하던 외교관 H는 “한국군에는 항상 ‘커널’(대령)이 문제”라고 증언했다).
김성수 감독이 본 12·12 군사반란은 그저 권력에 눈먼 인간들의 욕망이 만든 결과였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거창하게 쓰여진 어떤 역사는, 그 순간 개입한 많은 이들의 돌발적인 생각과 가치관, 됨됨이가 어우러져 만들어지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역사책에선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읽히는 필연의 역사가 실은, 멋진 사람들의 합리적 판단을 거쳐 나오는 게 아니란 감독의 통찰은, 섬뜩하다. 심지어 그는 “이런 일은 지금도, 늘 벌어진다”고 했다(그래서 더 섬뜩하다).
12.12 군사반란 직후인 1979년 12월 13일 동아일보 1면 보도. ‘정승화 계엄사령관 연행’, ‘김재규범행 관련 혐의’ 등의 제목이 달려 있다. 군사반란 직후에는 언론을 포함한 대한민국 국민 대다수가 정확한 상황 파악을 하기 어려웠다는 방증이다.
2023년 11월 10일 김용민 더불어민주당 의원(검사범죄대응TF 팀장)이 플래카드를 들고 국회의장실로 걸어가는 모습. 뒷줄은 왼쪽부터 이학영, 민형배, 강민정, 주철현 의원. 동아일보DB
그리고 또 어쩌랴. 44년 전 신군부는 총칼로 권력을 찬탈했지만 21세기 선출된 독재자는 사법부를 비롯한 제도와 기관을 자의적으로 바꿔선 겉으론 합법적으로 보이게끔 민주주의를 무너뜨린다. 그게 연성 파시즘이다. 지난 문재인 정권 시절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책을 인용해 나도 팔이 아프게 썼던 민주주의 파괴 말이다.
2021년 3월 4일 윤석열 당시 검찰총장이 대검찰청에 들어서며 기자들 앞에서 총장직 사의를 발표하는 모습. 동아일보DB
일주일에 몇 개인 지도 모를 재판에 출석하는 민주당 당대표 이재명이 재판 중 농땡이를 부리는 것도 믿는 구석이 있어서다. 대선 때 이재명이 대장동 핵심 실무자를 “몰랐다”고 말했던 선거법 위반 사건은 당선무효형에 해당하는 벌금 100만 원 이상의 형이 확정될 경우, 공직선거법과 국회법에 따라 의원직을 잃고 5년간 피선거권도 제한돼 차기 대선에 출마할 길도 막히는 엄청난 재판이다. 민주당이 선관위로부터 보전받은 대선 선거 비용 약 434억원도 토해내야 한다. 그런데 김명수가 만든 사무 분담 내규 등에 따르면 내년 2월 재판장이 바뀔 공산이 크다. 그러니 이재명이 하품을 안 하겠느냔 말이다.
민주당은 1일 국회 본회의에서 이재명 관련 수사 책임자였던 이정섭 대전고검 검사 직무대리와 손준성 대구고검 차장검사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단독 처리했다. 656조 원 규모의 내년 예산안 헌법상 처리 시한(2일)은 젖혀 놓고, 숱한 범죄 혐의로 재판 중인 당 대표 ‘방탄 탄핵’에 올인한 의원들 모습이 마치 내년 총선 공천을 앞두고 ‘강력한 누군가가 자신들을 리드해주길 바라는’ 꼬라지와 겹쳐 보인다.
그래서 묻고 싶은 거다. 수박으로 찍힐까 두려워, 이재명한테 찍힐까 겁나서, 이미 감찰받고 재판받는 검사나 탄핵하는 당신들이 무슨 국회의원이냐고.
12.12 군사반란 이틀 후인 1979년 12월 14일 반란 핵심 인물들이 보안사 건물 앞에서 촬영한 기념사진. 일부 보안사 간부는 반란 계획을 모른 채 전두환의 지시에 따랐던 경우도 있었다. 앞줄 왼쪽부터 이상규 최세창 박희도 노태우 전두환 차규헌 유학성 황영시 김윤호 정호용 김기택. 둘째 줄 왼쪽부터 박준병 이필섭 권정달 고명승 정도영 장기오 우국일 최예섭 조홍 송응섭 장세동 김택수. 세 번째 줄 왼쪽부터 남웅종 김호영 신윤희 최석립 심재국 허삼수 김진영 허화평 이상연 이차군 백운택. 동아일보DB
김순덕 대기자 doba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