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정원’ 쓴 성종상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인터뷰
한국 최고의 사대부 정원으로 꼽히는 전남 담양 소쇄원. 담양=김선미 기자
서울대 교정에서 만난 성종상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현대인이 내면을 치유하는 길은 정원을 통해 자연을 가까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선미 기자
국화 분재가 벽에 그림자를 드리운 모습. 우리 옛 선조는 다양한 방법으로 식물을 감상했다. 김선미 기자
소쇄원 제월당 뒤 파초. 조선 사대부는 석양빛과 그림자, 바람 눈 빗소리 등 공감각을 활용해 자연을 감상했다. 담양=김선미 기자
“요즘 우리 아이들이 갈 데가 게임방과 학원 두 군데밖에 없잖아요. 감수성 예민한 시기에 게임방 가서 ‘사람 죽이고’ 학원에서는 경쟁에 시달려요. 그런 환경에서 과연 아이들이 꿈을 가질 수 있을까요. 그런데 자연과 지속적으로 교감하면서 호연지기를 기를 수 있는 곳, 예술 감각을 깨우고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곳이 있어요. 그게 정원이에요.”
담양 소쇄원으로 들어서는 길의 대나무 숲. 담양=김선미 기자
―정원이 사회 문제들을 풀 수 있다고요.
“한국 사회에 정원이 많이 퍼져야 해요. 8년 전 어느 지방 건설업체가 수도권에 진출하면서 주차장을 지하로 내리고 지상을 전부 녹지로 만들어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래서 제안 드렸죠. 나무만 많이 심는 게 능사는 아니라고. 경계를 따라 텃밭 정원을 만들자고요. 그랬더니 텃밭을 함께 가꾸면서 아파트 주민끼리 친해졌어요. 눈인사만 하던 사이에서 함께 먹을거리를 나누는 관계로 발전한 거죠. 도시에서 텃밭은 소셜 스페이스(사회적 공간)에요. 요즘 층간소음 문제 많죠? 이웃끼리 이름을 불러주며 밥도 같이 먹는 친한 사이가 되면 서로 조심할 수밖에 없어요. 많은 사회 문제들이 정원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믿어요.”
창덕궁 영화당에서 내다 본 부용지 . 정조는 이 권역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성종상 교수 제공
“서구의 유명 위인들은 물론 고산 윤선도와 다산 정약용 등 한국의 위인들도 정원을 잘 가꿨어요. 어쩌면 정원이 있었기에 그들이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 같아요. 정원을 통해 고난과 갈등을 승화시켰으니까요.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디다. 어린 시절 부모나 조부모와 함께 정원생활을 했다는 점이에요. 어릴 적 자연과 교감하는 경험이 정말로 중요합니다. 정원은 사람됨의 조건인데, 여유 없이 살아온 우리는 정원을 지나치게 사치품으로 인식하는 측면이 있어요. 특히 한국의 사회 지도층이 정원에 관심도 안목도 없어 안타깝습니다. 부디 정원의 가치와 효용을 알고 정원문화를 확산시켜줬으면 합니다. 그래야 다음 세대에게 미래가 있습니다.”
순천만국가정원 물가에 놓인 의자들. 시민들의 휴식처로 사랑받는다. 순천=김선미 기자
“국가가 정원을 주도하는 게 대단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 그래요? 의외인걸요.
“세계에서 국가 정원을 지정해 운영하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을 겁니다. 정원은 지극히 개인적 심미 활동의 산물인데 국가라는 최고 권력이 개입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안 맞죠. 그럼에도 우리나라처럼 정원 문화가 꽃피우지 못한 상황에서는 당분간 국가나 공공이 정원 정책을 끌고 나갈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정원박람회도 좀 더 정교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어요.”
―정원박람회를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씀인가요.
“제가 1990년대부터 각국의 정원박람회를 많이 다녔습니다. 특히 독일이요. 합리적이면서 실속을 챙기는 독일인들은 ‘그린(Green) 문화’를 삶 속에서 실천합니다. 한국은 정원박람회를 쇼나 이벤트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힘이 많이 들어가고 단발성으로 그치는데요. 독일의 정원박람회는 도시를 일거에 쇄신하는 전략입니다. 독일은 입지와 상태가 나쁜 땅에 박람회를 열어서 그 주변이 개발의 힘을 받도록 합니다. 지저분하고 낙후된 공간이 아름다운 정원으로 바뀌면 민간이 스스로 찾아와 주변을 개발하죠. 공공에서 리드하고 민간이 따라오는 선순환을 이뤄야 합니다.”
한국 정원의 절제미와 감각을 한껏 드러내는 경기 용인 호암미술관 희원. 용인=김선미 기자
“영국 코티지(농촌풍) 정원은 쫓아다니고 따라 만들려고 하면서 정작 우리 정원은 몰라요. 왜 우리 것을 잊었을까 안타까워요. 생각해보면 한국은 일단 정원에 대한 용어학(terminology)이 발달하지 못했어요. 현대 한국조경의 역사가 50년 됐지만 급하게 외국 것들을 받아들이느라 우리 것으로 소화하는 과정이 없었어요. 일본만 해도 정원 미학을 소개하는 용어가 많지요. 우리는 있는 그대로만 즐겼지 그걸 개념화, 용어화하는 과정이 없었던 거예요.”
퇴계 이황이 생전에 청량산을 오가며 걷던 낙동강변의 예던길. 성종상 교수 제공
“아, 말씀 잘하셨어요. 독일인 이참 씨가 한국관광공사 사장을 지낼 때 만났더니 이렇게 얘기합디다. 왜 한국분들이 독일 하이베르크까지 가서 철학자의 길을 찾는지 모르겠다고요. 칸트는 걷지도 않았던, 그저 만든 관광상품이라고요. 그곳보다 훨씬 근사한 철학자의 길이 한국에 있다고요. 퇴계 이황이 친구 후배 제자들과 함께 걸었던 안동 토계에서 청량산을 잇는 낙동강변 길이 바로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철학의 길’이라고요. 우리 것을 소중하게 여기고 가치를 만드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겸재 정선이 그린 계상정거도. 겸재가 퇴계 사후 170여 년이 지난 시점에 도산서원을 방문해 그린 그림으로 1000원짜리 지폐에도 담겨있다. 고요하게 머무는 삶을 묘사했다. 삼성문화재단 제공
“‘긴수작 한수작’은 퇴계 선생이 주신 훌륭한 정원 용어입니다. 자연법칙으로 이뤄진 미학의 장으로서 정원은 퇴계에게 배움과 휴식, 그리고 심미의식을 즐기는 장소였어요. 퇴계는 어려운 공부만을 하기(긴수작)보다 산수를 한가하게 노니면서 감성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어요. 열심히 하는 ‘긴수작’은 기성 세대들은 대체로 다 잘하죠. 과연 ‘한수작’도 잘하는지는 모르겠어요. 한수작이 제대로 있어야 삶이 온전해집니다.”
도산서당 정우당과 절우사. 퇴계는 서당 앞마당에 못을 파고 연꽃을 심어 정우당이라고 이름 짓고 담 밖 도랑 건너 언덕에는 소나무 대나무 매화 국화를 심고 절우사로 불렀다. 성종상 교수 제공
―뤽상부르 박물관이 어떻게 한국 정원에 관심을 갖게 됐나요.
“정원 문화가 고도로 발달한 프랑스인들이 자기들이 앞으로 가야 할 방향을 한국 정원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는 걸 보고 놀랐습니다. ‘K-드라마’를 보니 인간이 만든 고궁과 산이 만나는 모습이 참으로 자연스럽고 친밀해 보이더라고 합니다. 서구처럼 인간의 질서가 강요된 정원이 아니라 자연이 건강한 활력을 갖는 정원이라면서 ‘K-정원’(한국 정원)에서 정원의 미래를 찾더라고요. 자연의 섭리를 읽어내고 겸허하게 마음으로 즐기는 정원이 한국 정원인 걸 알아본 거죠.”
창덕궁 후원. 정조는 학문과 사상 소통을 하는 공간 정치의 현장으로 정원을 활용했다. 성종상 교수 제공
소쇄원 위쪽 계곡물을 다른 쪽으로 나눠 돌리기 위해 가운데를 판 통나무를 놓아 물길을 만든 모습. 담양=김선미 기자
▽성종상 교수는-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대통령자문건축문화선진화위원, 한국조경설계연구회장, 한국생태환경건축학회장, 서울대 환경대학원장 등 역임
-문화재청 문화재위원, 한국내셔널트러스트 이사, 한국ICOMOS 이사 등으로 활동 중
-인사동길, 국립중앙박물관, 호암미술관 한국정원 희원, 선유도공원,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장, 천리포수목원 입구정원 등 설계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