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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모범생 獨, 어쩌다 ‘예산 사고’를 쳤을까[조은아의 유로노믹스]

입력 | 2023-12-05 14:54:00


독일 무역 수출항 함부르크 AP뉴시스

유럽의 경제대국 독일이 최근 ‘예산 공백’이라는 초유의 위기에 처했다. 독일 정부가 이미 짜 놓은 올해와 내년 예산이 위헌이란 연방헌법재판소 판결이 나왔기 때문이다. 정부 예산 집행에 제동이 걸리면서 복지예산까지 줄여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사상 초유의 사태가 터지자 올라프 숄츠 총리가 이끄는 2년 연정이 무너질 수 있다는 경고도 들린다.

원래 독일은 유럽 국가 중 재정 건전성이 탄탄한 모범생으로 꼽힌다. 2020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뒤 각국의 재정 풀기 속에서도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채 비율을 잘 관리해왔다. 그랬던 독일에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추경해도 24조 원 부족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 AP뉴시스

독일 예산 위기의 시작은 지난달 15일(현지 시간) 독일 신호등(사회민주당·빨강, 자유민주당·노랑, 녹색당·초록) 연립정부의 올해와 내년 예산이 위헌이라는 독일 연방헌법재판소 판단이 나오며 시작됐다.

연립정부는 2021년 코로나19 확산기에 집권하기 시작하며 코로나19 대응에 쓰이지 않은 600억 유로(약 86조 원)를 기후변환기금(KTF)으로 바꿔 쓰기로 결정했다. 정부는 독일 헌법에 따라 새로운 부채를 GDP의 0.35%까지만 조달하도록 제한을 받는데, 코로나19 등 특별한 위기 상황에선 이 규제를 적용받지 않을 수 있다. 코로나19 예산은 이 규제 적용이 제외돼 있으니 정부가 이를 손쉽게 집행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KTF로 전용한 것이다. 하지만 사법부는 그렇게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위헌 판단을 내리며 KTF를 위한 국채 발행 허가를 무력화했다.

예산 공백이 생기자 독일 내각은 448억 유로(약 64조 원) 규모의 올해 추가경정예산안을 의결하며 수습에 나섰다. 하지만 내년 예산안을 고려하면 여전히 170억 유로(24조 원)가 부족한 상황이다.

구멍 난 예산을 어찌 매울 지에 대해 논쟁이 치열하다. 고물가, 고금리로 경제가 가뜩이나 어려운데 증세 가능성이 언급된다. 취약계층에 대한 사회복지를 줄여야 한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재정준칙’ 개혁 목소리
이번 예산 위기를 점화한 건 결국 ‘부채 브레이크’라는 일종의 재정 준칙이다. 재정 준칙은 재정 건전성 지표다. 국가 부채가 일정 수준을 넘지 않도록 관리하는 규범이다. 한국에서도 국가 부채가 불어나면서 한국형 재정 준칙을 논의하고 있지만 국회에 관련 법안이 계류돼 있다.

한국에선 법제화조차 안 되고 있는 재정 준칙이 독일에선 일찍이 2009년 헌법에 명시됐다. 독일은 통일 직후인 1991년에도 GDP 대비 국가 채무 비율이 39%였을 만큼 재정이 탄탄했지만 통일 비용으로 막대한 재정을 쓰고, 저성장이 이어지며 나라 빚이 급격히 불어났기 때문이다. 이 관리 지표 덕에 실제 독일 GDP 대비 공공 부채 비율은 2010년 82%에서 2019년 60%까지 감소했다. 하지만 2020년 코로나19 대유행 대응을 위해 적극적으로 재정을 쓰느라 부채 브레이크는 중단됐다.

부채 브레이크는 정부 차입을 줄이는 목표를 잘 달성했다. 하지만 정부의 적극적인 투자를 제한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 때문에 2021년 독일 연방선거에서 녹색당은 인프라, 의료 및 교육에 대한 재정 지출에는 이 제도를 적용하지 않도록 법을 개정하자고 주장했다.

반면 개혁에 대한 저항도 만만치 않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슈피겔 여론조사에 따르면 독일인의 3분의 2가 부채 브레이크에 찬성하고 있고, 개혁을 하려면 설득이 더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독일인 대다수가 이 제도 덕에 독일 재정과 경제 기초체력이 강해질 수 있다고 믿는 것으로 보인다.


●“집권 연정 균열 확대”
부채 브레이크 개혁 논란이 빨리 마무리돼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독일 경제는 고물가, 고금리 여파로 고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유럽경제연구센터(ZEW)는 4일 “독일의 예산 위기가 이미 타격을 입은 경제에 또 다른 타격을 입혔다”며 “투자자 사기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밝혔다.

영국 대형 신용평가사 피치레이팅은 최근 독일 연방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 이후 “이번 판결이 독일 공공 재정의 건전성에 대한 피치의 근본적인 견해를 바꾸진 않는다”면서도 “내년에 부채 브레이크 규정이 재활성화 되면 재정 삭감이 필요할 수 있는데, 이는 집권 연정의 균열을 확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 “독일은 2023년 주요 7개국(G7) 가운데 경제가 위축되는 유일한 국가로, 2024년에는 예상 보다 더 큰 재정 긴축으로 회복세가 방해를 받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유럽에서 불거지는 경제 이슈가 부쩍 늘었습니다. 경제 분야 취재 경험과 유럽 특파원으로 접하는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담아 유럽 경제를 풀어드리겠습니다.

파리=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