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진 패션칼럼니스트
패션계에서 발라클라바는 두 가지 특성으로 주목을 받았다. 얼굴을 가리는 데서 오는 익명성, 그리고 보온과 같은 실용성이다. 1990년대에 마르지엘라나 알렉산더 매퀸 같은 디자이너는 얼굴을 얇은 천으로 감싸거나 금속이나 보석으로 뒤덮은 발라클라바를 페티시 패션, 정체성과 왜곡 같은 주제에 접근하는 도구로 사용했다. 미국과 영국에서는 드릴 같은 힙합과 폭력이 결합된 장르에서 신원 노출을 막기 위해 발라클라바를 활용했다.
관심과 수요가 커지면서 공급도 늘어났다. 많은 브랜드와 디자이너들이 신제품을 내놓으면서 색감도 다양해졌고, 니트 외에도 고어텍스나 라텍스, 다운 등을 이용한 여러 변형도 등장했다. 미우미우, 자크뮈스, 발렌시아가, 로에베 등 유수의 브랜드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익명성과 기능성을 섞으며 발라클라바를 새로운 영역으로 끌어오고 있다.
하지만 발라클라바는 지금 세계의 모순과 균열을 드러내기도 한다. 백인과 흑인이 발라클라바를 착용했을 때 사람들의 전혀 다른 대응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논쟁거리가 되었다. 발라클라바는 분쟁과 테러, 혐오 범죄 현장에서도 사용된다.
이렇듯 다양한 사회 정치적 층위를 가지고 있지만 유용하다는 점은 분명하다. 특히 건조하고 찬 바람이 부는 우리 날씨에 아주 잘 맞는다. 이런 확실한 장점은 발라클라바를 오랜 시간 살아남게 했고 새로운 운명을 만나게 했다. 앞으로 패션계가 또 어떤 새로운 아이템을 발굴해 낼지 궁금하다.
박세진 패션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