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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김금희]재현이를 만났다

입력 | 2023-12-05 23:33:00

버스 잘못 타 길 잃은 아이를 만난 추운 저녁
귀갓길 함께 걸으며 대화보단 길 찾기만 집중
그 여정, 우리가 우연히 함께한 ‘산책’일 수도



김금희 객원논설위원·소설가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 있는데 한 남자아이가 탔다. 십대 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였다. 어수선하게 자리를 옮겨 다니더니 버스 기사에게 갔고 뭐라 말하며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장난이라 생각했는지 기사는 전화를 받아주지 않았다. 혹시 길을 잃은 게 아닌가 신경 쓰이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아이가 내 옆자리로 와서 앉았을 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집에 못 가겠어요?” “네.”

추운 날씨는 오후가 되어 좀 누그러졌지만 아이 얼굴은 발갛게 얼어 있었다. 채우지 않은 점퍼가 눈에 들어왔다. “엄마 전화번호 알아요?” 아이는 안다고 대답하더니 기사에게 한 것처럼 전화를 걸어 건넸다. 엄마는 미안하고 한편으로는 아주 차분한 말투로 구청을 지나고 있다면 거기에 내려주면 된다고 말했다. “구청에 내려주면 혼자 찾아갈 수 있다는 말씀이시죠?” 엄마는 그렇다고 했고 너무 고맙다며 아이를 다시 바꿔달라고 했다. 집에 가 있으라고 타이르는 목소리가 전화기 밖까지 들렸다.

문제는 그렇게 대화하는 동안 구청을 한 정류장 지났고 내가 이제라도 내리자고 하자 아이가 싫다고 한 것이었다. 엄마와 통화하지 않았냐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채근하자 다행히 곧 마음을 바꿔 나를 따라 내렸다. 지나버린 구청을 향해 우리는 같이 걸었다. “나는 재현이에요.” 아이가 이름을 알려주었지만 내 머릿속에는 구청 생각뿐이라 내 소개는 건너뛰고 말았다. “몸만 바빠 알아요?” 이건 또 무슨 얘기일까 싶어 설핏 웃으며 모른다고 하자 재현이는 “친구 엄마, 아빠가 하는 거예요”라고 대답했다. 몸만 바빠는 식당 상호인가, 체육관이나 청소 관련 업체인가 아리송했다. 그 뒤로도 재현이는 가은이, 정호, 동구, 하면서 자기 여동생, 친구, 동네 형을 아느냐고 물었다. 물론 처음 듣는 이름들이었다.

“저, 화장실 가고 싶어요.” 재현이가 말했다.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는데, 다행히 대형마트가 보였다. 화장실을 안내해주고 기다리는데 붐비는 마트의 저녁 풍경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한 지붕 아래에서 같이 보낼 밤을 위해 모두들 바쁘게 장을 보고 있었다. 누가 보면 재현이와 나도 그런 사이로 보일 것이었다. 그렇게 각자의 하루를 마치고 맞는 밤들은 한편으로는 당연하지만 따져보면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일까 싶었다. 재현이는 한결 편안한 얼굴로 화장실에서 나왔고 나는 이제 우리 시야에 들어오는 건물을 가리키며 “저게 구청이야, 구청 알지?” 하고 물었다. 재현이는 안다고, 집에 갈 수 있다고 했지만 평소에도 불안이 많은 나는 여러 번 다시 확인했다. 그때마다 재현이는 귀찮아하지 않고 그럴 수 있다고 답했다.

“아줌마, 아빠 있어요?”

하천 육교를 지나 구청에 다다랐을 때쯤 재현이가 물었다. 백팩을 메고 안경을 쓰고 있으면 웬만하면 학생이나 미혼으로도 봐주던데 재현이는 내 나이대를 정확히 맞혔다. “그럼, 있지” 하고 답하는데 갑자기 마음이 뭉클했다. “엄마도 있어요?” 나는 그럼, 하며 당당하게 답했다. 하지만 그 뒤로 묻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에 관해서는 없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거의 뵌 적도 없다고 말을 더 덧붙이게 됐다.

우리는 구청 앞에서 헤어졌다. 재현이는 “안녕히 가세요” 하고 한마디를 남긴 후에 쿨하게 자기 갈 길을 갔다. 남겨진 나도 내 길을 가야 해서 막 도착한 마을버스를 탔는데 공교롭게도 반대 방향으로 가는 노선이었다. 나중에 깨달은 나는 황망하게 내려 다른 버스로 갈아탔다. 그러면서 생각해보니 같이 걸은 한 정거장의 의미를 나보다는 재현이가 더 잘 헤아리고 있었구나 싶었다. 낯선 이들이 우연히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면 당연히 자기 이름을 알려주어야 하고, 가능하면 공통 화제가 있는지 살펴야 하며 가족들은 어떻게 지내는지 안부를 물어봐주는 게 맞으니까. 하지만 나는 재현이가 수수께끼처럼 남겨놓은 “몸만 바빠”라는 말처럼 구청 도착만이 이 만남의 유일한 의미인 것처럼 무턱대고 걷기만 했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그 여정이 우리가 우연히 함께한 산책일 수도 있었다는 걸.

그러고 나서도 걱정을 놓지 못한, 어쩔 수 없는 어른인 나는 대화 중에 흘러나온 재현이네 집 이름을 검색해보았다. 다행히 구청 근처에 정말 있는 건물이었고 재현이는 잘 돌아갔겠구나 싶었다. 좀 걷더라도 몇 정류장 정도는 돌아서, 버스를 잘못 타는 건 누구나 하는 일이니까 재현이답게, 몸만 바쁘지 않게. 그러자 오늘 내가 했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모두 마친 기분이었다. 재현이를 버스에서 만났으니까.





김금희 객원논설위원·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