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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런 게 진짜 여행[이재국의 우당탕탕]〈87〉

입력 | 2023-12-07 23:27:00


2년 전, 친구가 아버지와 단둘이 유럽여행을 가야 하는데 걱정이 된다며 찾아왔다. 자신은 평소 아버지와 친하게 지내는 편이 아니라 아버지와 단둘이 떠나는 유럽여행이 부담스럽다고 했다. 친구 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무뚝뚝하고 엄한 분이셨고, 그 때문에 친구의 기억 속에 아버지는 늘 무섭고 어려운 존재로 남아 있었다. 자신이 결혼해서 한 집안의 가장이 됐고,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됐지만 역시나 아버지와의 관계는 나아지질 않았다.

이재국 방송작가 겸 콘텐츠 기획자

그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보신 어머니께서 아버지 건강이 허락할 때 아들과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에 부자의 유럽여행을 계획하신 것 같았다. 그렇게 걱정을 안고 떠난 여행은 역시나 어색함의 연속이었다. 친구가 질문해도 아버지는 늘 단답형이었고, 친구는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지 못했다. “파스타 드실래요?” “그래.” “에펠탑 보러 갈까요?” “그래.” “뭐 더 필요한 거 없으세요?” “없어.” 그렇게 7박 8일 일정으로 유럽여행을 다녀왔지만 둘 사이는 크게 좁혀지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전 친구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장례를 치른 후, 친구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그나마 아버지와 단둘이 떠났던 유럽여행이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이라고 얘기했다.

난 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셔서 아버지와 추억할 게 별로 없었다. 그러다 문득 형이 생각났다. 내 나이도 어느새 쉰이 넘었는데 생각해보니 형이랑 단둘이 여행을 가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추석 때 형을 만난 김에 친구 아버지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 둘이 여행 한번 가볼까?” 얘기를 꺼냈더니 형은 기다렸다는 듯 좋다고 했다. 이런 계획은 너무 오래 끌면 안 되기에 올해가 가기 전에 제주도라도 다녀오자고 약속했고, 11월 말로 계획을 세웠다. 그렇게 단둘이만 여행을 떠나려고 했는데 어느 날 작은 누나에게 연락이 왔다. 이왕이면 “매형 두 분도 모시고 가라”는 얘기였다. “너희 둘은 아직 젊으니까 언제든 둘이 또 갈 수 있지만 매형들이랑 언제 여행을 가보겠냐?”는 작은 누나의 말에 설득당했고, 그렇게 매형 두 분과 형, 나 이렇게 넷이 제주도로 3박 4일 여행을 떠났다.

여행하는 동안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제주도 여행 사진을 올렸더니 누구랑 갔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형이랑 매형 두 분이랑 넷이 왔다고 하니까 모두가 “진짜?”냐고 몇 번씩 물어봤다. 내가 생각해도 평범한 조합은 아니었기에 물어보는 사람마다 “진짜!”라고 상황 설명을 해줬다. 첫날은 제주 흑돼지구이를 먹고 다음 날 아침에 함께 고사리 해장국을 먹고 비자림도 걷고, 성산일출봉에도 오르고 저녁은 미리 예약한 횟집에서 구문쟁이 회를 먹으며 소주도 한잔했다. 다음 날은 애월 해안도로에서 커피도 마시고, 곶자왈 숲길도 걷고 마지막 날 아침은 보말칼국수까지 맛있게 먹었다.

어렸을 땐 매형들도 젊은이였는데, 내 나이가 50이 넘고 보니 매형들도 어느새 머리가 희끗희끗, 나이는 환갑을 넘겨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얘기부터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얘기, 우리 엄마 음식 솜씨 얘기 그리고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까지 얘기하다 보니 매일 새벽에야 잠이 들었다. 그렇게 여행을 마치고 공항에서 매형 두 분이 “처남들이랑 처음 여행 가는 거라 3박 4일이 길 줄 알았는데 시간이 금방 갔네. 고마워 처남” 하시며 손을 잡아주시는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형이랑 단둘이 떠나는 여행은 조금 미뤄졌지만 누나들 없이 매형 두 분이랑 여행을 가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여행하며 찍은 사진은 모두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찍은 사진처럼 차렷 자세의 사진들뿐이지만 이 또한 추억으로 기억되겠지.






이재국 방송작가 겸 콘텐츠 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