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정 몰카 공작 저열함도, 거기에 당한 대통령실도, 그 가방을 뿌리치지 않은 김 여사도 모두 상상초월 김 여사는 관저 떠나 사저(私邸)에서 근신하고 준 쪽, 받은 쪽 모두 법 위반 여부 엄정 조사해야
이기홍 대기자
‘분노와 한숨.’
좌파든 우파든, 진보든 보수든 사람들이 요즘 정치권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상대편의 행태를 보면 분노가 치밀고, 자기편을 보면 한숨이 저절로 나오는 상황인 것.
그 분노라는 단어를 며칠 전 문재인 전 대통령이 썼다. 12·12쿠데타를 소재로 한 영화를 보고 나서 “불의한 세력에 대한 분노”라고 했다.
자기네 진영을 수사하는 검사를 탄핵하고, 자기네 진영 나팔수 역할을 해주는 공영방송들을 총선 때까지 계속 자기편으로 두기 위해 방통위원장을 탄핵 도마에 올린다. 5공 시절 집권당도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는 안 했다. 아무리 총칼로 집권했어도 국민 다수의 상식의 눈을 두려워하는 최소한의 센서는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민주당엔 그 수준의 자기 절제 센서조차 작동하지 않는다. 다수결이면 뭐든지 해도 된다는 착각에 빠져있다.
정권교체를 이뤄낸 국민들은 그런 다수당을 보며 분노가 치밀지만 고개를 돌려 대통령실과 여당을 보면 참담한 실망감에 한숨이 터져 나온다.
“대통령 부인이 명품백을 받는 장면을 담은 영상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김의겸의 청담동 술자리 주장 같은 가짜뉴스거나, AI 딥페이크 영상이겠거니 했다.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현직 퍼스트레이디가 친(親)적국(敵國) 활동 경력이 있는 인사를 만나 보석을 선물 받는데 이게 다 함정 몰카에 찍힌다~.’
이번 사건이 보여준 상상 초월의 세계는 세 종류다. 하나는 상상 초월의 저질스러운 공작 행태고, 둘째는 상상 초월의 허접한 사람 관리 및 경호 시스템이고, 셋째는 대통령 부인이 보여준 상상 초월의 행동이다.
이 세 요소는 서로의 상상 초월성을 상쇄하지 않는다. 김 여사가 백을 받았든 안 받았든 몰카 공작의 저열함과 비도덕성은 줄어들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함정 몰카라해서 김 여사 행동의 비도덕성이 감면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공원 벤치 두 개에 각각 100만 원 씩의 현금이 놓여 있다고 하자. 첫 번째 벤치 현금은 누군가 실수로 두고 간 것이고, 두 번째 벤치 현금은 함정 몰카범이 쳐놓은 덫이다.
그 돈을 누가 집어가든, 아무도 집어가지 않든 덫을 놓은 몰카 행위의 부도덕성이 바뀌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누군가 돈을 집어 갔다면 그것이 첫 번째 벤치 돈이든 두 번째 벤치 것이든 그 행동에 대한 비판은 똑같이 적용된다. 현금이 놓인 경위와는 무관한 것이다.
하지만 좌파의 비도덕성에 대한 개탄과 김 여사의 행동에 대한 비판은 별개의 문제다.
하급직 공무원의 배우자라 해도 그런 선물은 받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누구나 유혹은 느끼기 마련이지만 최소한의 위험 감지 능력이 생존 본능처럼 작동하기 때문이다.
김 여사는 하루빨리 국민 앞에 사과해야 한다. 그리고 관저를 떠나 서초동 자택 등 사가(私家)로 거처를 옮겨 근신해야 한다.
물론 아무리 대통령이라 해도 부부는 사적인 영역이다. 그럼에도 대통령 배우자는 공인이다. 더구나 ‘김건희 리스크’는 총선과 나라의 진로에 지속적으로 상당한 영향을 미칠 사안이다.
이번 사건은 특검을 앞세운 야당 공세에 휘발유를 뿌린 격이 될 것이다. 공천 개입설, 인사 개입설 등 믿거나 말거나 의혹을 계속 기름 붓듯 쏟아낼 것이다.
이를 차단하기 위해서도 김 여사는 의혹의 소지를 원천 차단할 수 있는 위치를 자처하고, 윤 대통령은 특별감찰관을 조속히 임명해 확고한 의지를 피력해야 한다. 특검 공세에 대응할 운신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도 명품백 파문의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
대선 4개월 반 전 김 여사는 눈물을 흘리며 “아내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악의적 편집 가능성을 염두에 두더라도 취임 4개월이 지난 시점인 영상 속 모습은 약속과는 달라 보인다.
물론 김 여사에 대한 좌파 진영의 공격에는 마녀사냥, 여성 비하, 공작적 요소들이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그들이 제기했던 의혹들 중 사실로 최종 확인된 것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번 건은 다르다.
정치적 유불리를 떠나서도 그렇다. 쉬쉬하고 넘어간다면 앞으로 전국의 공직자 배우자들에게 어떻게 김영란법 준수를 요구할 수 있겠나. 국민권익위는 왜 존재하는 기관인가. 신속히 진상 조사에 착수해 금품을 준 쪽과 김 여사 쪽 모두의 법 위반 여부를 엄정히 조사하는 것이 직분 아닌가.
이번 파문은 정권교체를 열망하며 한 표 한 표 벽돌을 쌓듯이 정권교체를 이뤄낸 국민에게 배신의 상처를 안겼다. 진심 어린 사과와 근신의 자세, 배우자 논란의 소지를 원천차단할 안전장치 마련 없이는 이를 치유할 방법이 없다.
이기홍 대기자 sechep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