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발표 믿고 집 산 사람들만 발 동동 입주물량 급감에 맞춰 절충안 마련해야
정임수 논설위원
주택시장에서 실수요, 투자, 투기만큼 구분이 모호한 게 없다. 무주택자나 1주택자가 전세를 안고 집을 사면 갭투자로 눈총 받다가도, 나중에라도 들어가 살면 실수요자라는 당당한 호칭을 얻게 된다. ‘부동산 투기와의 전쟁’에 나섰던 지난 정부는 실거주 의무를 강화하는 대책들을 쏟아냈다. 2017년 8월 1가구 1주택자의 양도소득세 면제 요건에 ‘2년 실거주’를 부활시켰고, 2020년 6월 재건축 조합원의 ‘2년 실거주’를 도입했다.
이어 2021년 2월엔 분양가상한제 아파트의 실거주 의무를 시행했다. 수도권에서 분양가상한제 아파트를 분양받은 청약 당첨자는 최초 입주일부터 최소 2년 이상 거주하도록 강제한 것이다. ‘로또 분양’을 노린 투기 수요를 막겠다는 취지였다. 목돈이 부족한 서민들이 전세를 놓아 분양 대금을 치르고, 몇 년 뒤 돈을 모아 입주하는 내 집 마련의 사다리를 차버렸다는 지적이 많았지만 당시 정부는 집값을 잡는 게 먼저였다.
팬데믹 이후 집값 하락으로 시장 상황이 달라지자 현 정부는 올 1월 청약 당첨자의 실거주 의무를 폐지하겠다고 발표했다. 건설사들은 정부 대책을 앞세운 홍보로 그동안 쌓였던 미분양을 털어냈다. 단군 이래 최대 재건축으로 불리는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의 ‘줍줍’(무순위 청약)엔 4만여 명이 몰렸다. 그만큼 실거주 의무 폐지 등 분양 규제 완화에 수요자들이 목말라 있었다는 뜻이다.
이렇다 보니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선 법망을 피할 방법이 공유되고 있다. 실거주 의무를 지키지 않으면 1년 이하의 징역이나 1000만 원 이하 벌금형에 처해진다. 의무 기간 내에 이사 나가면 한국토지주택공사(LH)에 분양가 수준으로 집을 되팔아야 한다. 청약자들 사이에선 입주를 못 해 계약금을 날릴 바에는 세를 주고 벌금을 물겠다는 얘기가 나온다. 분양권을 판 뒤 본인이 세입자로 2년간 살면서 거주 의무를 채우겠다는 이면계약도 거론된다. 이 같은 혼란을 자초한 정부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여소야대 국면에서 야당의 협조가 없으면 법 개정이 힘든 걸 알면서도 섣부른 발표로 혼선을 가중시켰다.
야당은 실거주 의무가 사라지면 갭투자가 성행할 수 있다며 법 개정에 반대하고 있다. 그 대신 조건부로 예외를 허용하는 방안을 시행령에 담고, 애매한 사유에 대해선 전문가로 구성된 위원회를 꾸려 판단하자는 대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예외 규정을 열거하는 방식으로는 제도가 누더기가 돼 시장 혼란을 더 부추길 소지가 적지 않다. 실거주 의무 여부를 가리겠다고 위원회까지 두는 건 행정력 낭비가 아닐 수 없다.
통상 새 아파트 입주를 앞두고 전월세 물량이 쏟아지기 마련이지만 실거주 의무 적용 단지에서는 이런 움직임이 전혀 없다. 가뜩이나 내년 서울 입주 아파트가 올해의 3분의 1로 급감하는 상황에서 실거주 의무에 따른 전월세 공급 경색까지 겹치면 전세시장 불안은 심해질 수밖에 없다. 이미 서울 아파트 전셋값은 29주째 오름세다. 국회는 2020년 재건축 조합원의 실거주 의무로 세입자가 밀려나고 전셋값이 급등하자 1년 만에 백지화한 바 있다. 부작용이 되풀이되기 전에 이번 실거주 의무도 서둘러 손봐야 한다. 양도세 면제 요건처럼 입주 시점부터가 아니라 보유 기간 중 거주 의무를 채우도록 하는 보완책이라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정임수 논설위원 imso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