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일 프랑스 파리 튈르리 정원의 크리스마스 시장 한쪽에 범퍼카들이 텅텅 빈 채 늘어서 있다. 인근을 오가는 사람들 또한 거의 없었다. 이곳에서 지갑을 여는 소비자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파리=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
조은아 파리 특파원
《7일(현지 시간) 낮 프랑스 파리 튈르리 공원 크리스마스 시장.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매년 열리는 대표적인 관광 명소이지만 점심시간인데도 ‘먹거리 장터’ 쪽이 유독 한산했다. 전통 음식인 뱅쇼, 크레페 등을 파는 분식 매장 6곳 중 사람들이 보이는 곳은 2, 3곳뿐. 그마저도 한두 명씩 서 있을 뿐 대기 줄이 길지 않았다.
이곳을 지나던 주부 앙젤리크 상셰즈 씨는 “크리스마스 만찬 음식을 만들 식재료는 가격이 할인되는 크리스마스 전날 장을 볼 것”이라며 “미리 사면 오히려 비싸다”고 했다. 크리스마스 대목 이후 가게들이 남은 상품을 세일할 때 알뜰하게 장을 보겠다는 얘기다.
파리 도심은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한껏 치장했지만 정작 파리지앵들은 한 푼이라도 아끼려는 노력이 한창이었다. 지난해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에너지와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며 2년 내내 고물가가 이어지고 있는 탓이다.》
식품 물가 고공 행진
7일(현지 시간) 프랑스 파리 갈르리 라파예트 백화점의 식품 코너 모습. 크리스마스가 약 2주 앞으로 다가왔지만 다른 층에 비해 한산하다. 파리=조은아 특파원 achim@donga.com
이 백화점 식품 코너에서 직접 확인해 본 물가 수준은 자크 씨의 말이 사실임을 보여줬다. 작은 책 크기만 한 초콜릿은 크리스마스를 맞아 ‘반값 할인’을 하고 있는데도 60유로(약 8만 원)에 달했다. 성탄절 만찬 식탁에 디저트로 오르는 샴페인 젤리는 스마트폰 절반 크기였음에도 15유로(약 2만 원)였다.
많은 파리지앵은 프랑스의 식품 물가가 유럽 주요국 중 최고 수준이라는 점에 불만을 표한다. 일간 르피가로에 따르면 소비자 전문 매체 ‘LSA’가 지난해 1월∼올해 8월 유럽 각국의 식품 물가 상승률을 조사한 결과, 프랑스가 17.9%로 1위였다. 스페인(17.2%), 영국(16.7%), 이탈리아(16.4%), 독일과 벨기에(각각 15.5%)보다 높다.
프랑스의 식품 물가 상승률이 높은 이유 중 하나로 대형마트와 납품업체 간의 독특한 가격 협상 체계가 꼽힌다. 르피가로는 “다른 유럽 국가는 대형마트와 납품업체가 1년 중 수차례 협상을 진행하지만 프랑스는 연 1회만 하기에 상승률이 한꺼번에 높게 반영된다”고 분석했다. 연 1회 협상은 작황, 기후변화 등 매년 시시각각 달라지는 상황을 반영할 수 없으므로 소비자에게 매우 불리한 구조다.
할인매장서 ‘반값 쇼핑’
허리띠를 더 조이려는 소비자들은 백화점 대신 할인마트로 향한다. 실제 이날 찾은 파리 외곽의 재고 처리 매장 ‘악시옹’에는 쇼핑객이 끊이지 않았다. 크리스마스트리에 다는 공 모양 장식품은 백화점에선 1개에 7유로(약 9900원)였지만 이곳에선 0.99유로(약 1400원)에 불과했다. 세일 중인 장식품 매대는 이미 상품이 다 팔려 텅 비어 있었다.
특히 파리 도심에서 이런 할인마트의 성장세가 두드러진다. 프랑스앵포에 따르면 대표적인 할인마트 ‘니들’은 작년에만 약 20개 점포를 개장했다. 경쟁사 ‘알디’는 이미 2021년에 기존 매장 554개를 인수하며 몸집을 불리고 있다. 프랑스앵포는 “인플레이션은 할인매장의 성장세를 방해하지 못했다”고 평했다.
주로 서민들의 단골인 할인마트가 식재료 품질에 민감한 파리지앵들의 마음을 산 비결은 식품 코너의 고급화라고 현지 언론들은 분석한다. 보통 할인마트는 식품 품질이 떨어진다는 이미지가 강했다. 이를 의식한 할인마트들은 특히 제빵, 신선식품 분야의 품질을 높이는 데 공들였다. 마케팅을 줄여 비용을 절감하는 전략도 통했다.
ECB 조기 금리 인하설
당국은 장바구니 물가를 통제할 뾰족한 수단이 마땅치 않아 고민이다. 정부는 올 8월 유통기업과 납품기업 간의 연례 가격 협상 시기를 앞당겼다. 당시 가격을 동결하거나 인하하는 제품 수를 5000개로 확대해 달라고 요청했다. 또 판촉 행사를 적극적으로 늘릴 것을 유통기업들에 당부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식품 가격 상승세가 잦아들지 않고 있다.경제 전문가들은 당국의 강력한 가격 통제 정책이 큰 효과가 없다고 지적한다. 시사매체 ‘레제코’ 또한 같은 맥락에서 헝가리를 반면교사로 삼으라고 조언했다.
헝가리는 2021년 10월부터 돼지갈비, 치킨가스, 해바라기유, 파스타, 빵 등 주요 식품 가격을 통제하다가 올 8월에야 가격 통제를 풀었다. 그 여파로 2022년 12월 헝가리의 물가 상승률은 49.6%를 기록했다. 그간 꾹꾹 억눌렸던 가격 상승세가 한꺼번에 반영된 여파로 풀이된다. 즉, 당국이 특정 물품의 가격을 일시적으로 통제할 수는 있어도 영원히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는 어떤 식으로든 시장 왜곡을 초래해 상당한 후폭풍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유럽중앙은행(ECB)이 독일 등 경기 침체 위험이 고조되고 있는 유럽 주요국의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시장 예상보다 일찍 금리 인하를 단행할 것으로 보고 있다. ECB는 고물가에 대처하기 위해 지난해 7월부터 올 9월까지 10회 연속 기준금리를 올렸다. 하지만 각국에서 경기 침체 우려가 커지고 물가 상승세 또한 잦아들자 올 10월에는 금리를 동결했다.
호주뉴질랜드은행(ANZ)의 브라이언 마틴 글로벌 경제 헤드는 다우존스에 “ECB가 내년 3월부터 금리를 내리기 시작할 것”으로 내다봤다. 블룸버그 이코노믹스 또한 ECB가 내년 6월 금리를 인하할 것으로 예상했다.
다만 기준금리를 인하하면 아직 불씨가 꺼졌다고 보기 어려운 물가 상승 압력이 다시 커질 수 있다는 점이 문제다. 이에 크리스틴 라가르드 ECB 총재 또한 과도한 금리 인하 전망을 경계했다. 그는 최근 “지금은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선언할 때가 아니다”라며 “물가상승률 목표 수준을 달성하지 못할 위험이 커지면 다시 (통화 긴축)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했다.
조은아 파리 특파원 ach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