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자마다 가족, 노후 상황 다르기에 섣부른 돈, 자식 자랑 남에게 상처 줄 수도 이미 퇴사로 아픔 겪은 퇴직자들의 마음 말 한마디가 상대에겐 비수 됨을 알아야
일러스트레이션 갈승은 atg1012@donga.com
정경아 작가·전 대기업 임원
연말이라 그런지 거리가 북적거렸다. 도로마다 환한 조명과 곳곳의 크리스마스트리가 성탄절의 분위기를 물씬 자아냈다. 언제 바이러스로 인한 거리 두기가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사람들의 표정도 한껏 들떠 보였다. 나 역시 이전 직장 선후배를 만난다는 기대에 잔뜩 설렜다.
“잘들 지내셨습니까?” 예약된 룸으로 들어올 때마다 모두들 큰 목소리로 인사했다. 이미 도착한 사람들도 이야기를 멈추고 반갑게 맞아 주었다. 간만에 본 사람들의 모습은 꽤나 변해 있었다.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데 특히 오래전 퇴직한 선배들이 그랬다. 지난날 긴장감 있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어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선배는 회사를 나온 후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최근 작은 제조업체에 취업했다고 말했다. 관리부장 자리인데 하는 일에 대해서는 사무실 업무부터 상품 배송까지 범위가 상당하다고 하였다. 방금 전에도 거래처에 물량을 납품하고 오는 길이라며 모임에 늦은 이유를 설명했다. 현직 때와 비교하면 수입도 직위도 턱없이 낮아졌지만, 선배는 여러 번 시도 끝에 취업이 된 것만 해도 감사한 일 아니냐며 씨익 웃었다. 퇴직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는 선배의 모습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죄송합니다.” 그때 또 한 사람이 도착했다. “회의가 늦게 끝나서요.” 연신 미안하다고 말하며 들어온 사람은 B 선배였다. 얼마 전 모 기업의 임원으로 이직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래서인지 얼굴이 밝아 보였다. 선배는 앉자마자 자신의 근황을 쏟아냈다.
“제가 가자마자 프로젝트를 기획했는데 대박 났습니다.” 선배는 새로운 회사에서 본인이 얼마나 인정받고 있는지부터 이야기했다.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결국 성공시켰다며 뿌듯한 내색을 감추지 않았다. 안 물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는데, 이어서 또 다른 주제를 꺼냈다. “저희 둘째가 작년에 의대에 들어가지 않았겠습니까.” 다음엔 애들 자랑이었다. 여러 대학에 합격해서 최종 선택하느라 진땀을 뺐다는 말도 덧붙였다. 식사는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뒤로도 로스쿨에 들어간 첫째 아이 얘기까지 선배의 자기 자랑은 끝이 날 줄 몰랐다. 듣는 내내 B 선배와 한때 동기였던 A 선배가 신경 쓰였다.
모임을 끝내고 돌아오는데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늘 같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송년회 모임인데 이전과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다. 지난날 기분 좋게 함께했던 분위기는 더는 없었다. 공통된 주제 없이 각자 관심사만 오고 가다 어색하게 자리가 마무리됐다. 퇴직이 원인인 것 같았다. 바뀐 점이라고는 모임에 나오는 사람들이 전과 다른 삶을 살아가는 것 외엔 없는데, 순간순간 낯선 이들과의 만남처럼 느껴졌다. 같은 회사 직장인에서 살아가는 환경이 변하니 대화를 길게 이어 나가기도 어려웠다. 한 해의 끝자락을 앞두고 서로를 다독이려고 모인 송년회가 개운치 못한 뒷맛만을 남기고 말았다.
직장인이 퇴직할 즈음에 아이는 대학 진학을 하거나 취업할 나이가 된다. 누군가의 자녀는 명문대에 입학하고 번듯한 직장에 들어가겠지만, 반대로 누군가의 자녀는 원하는 대학에 낙방하거나 출근할 회사가 없을 수 있다. 마음처럼 되지 않는 게 자식 농사인데도 다른 이의 자랑을 들으면 모든 게 내 탓인 듯하여 스스로 책망하게 된다. 또한, 노후 준비가 충분치 않은 퇴직자는 경제적 고민도 부담일 수밖에 없다. 당장 생활비 마련이 시급한데 마땅한 일자리를 구하기도 쉽지 않아 두 번째 세상살이는 더 힘겹다. 여기에 연로하신 부모님과 병에 걸린 가족까지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라면 앞날이 막막하기만 하다.
이번 송년회를 다녀온 후 깨달은 점이 있다. 퇴직자일수록 서로를 더 배려해야 한다는 점이다. 퇴직의 아픔은 같은 퇴직자가 아니면 가까운 가족조차 가늠하기 어렵다. 그래서 퇴직자들은 더더욱 나를 드러내기에 앞서 타인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나의 말 한마디가 다른 사람에게 비수로 꽂히고 내 행동 하나가 상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그저 조용히 지켜보거나 찬찬히 들어주기만 해도 좋을 것 같다. 경우에 따라서는 과도한 관심도 버거울 때가 있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지만 퇴직자들의 마음은 이미 한 번 꺾였다. 수십 년간 몸담았던 회사에서 떠밀려 나오는 심경을 누가 알랴. 혹여 퇴직자 자신의 헛헛함을 자식 자랑이나 돈 자랑으로 채우려 한다면, 이는 상대에게 상처만 줄 뿐이다. 결코 나와 다르지 않을 동료의 심정도 헤아려 보자. 올 연말 모임, 퇴직자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공감하는 마음이다.
정경아 작가·전 대기업 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