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4월 8일, 김정선은 죽음의 문턱에서 구조된 혁재와 가족이 됐다. 혁재의 친부모는 혁재가 태어났을 때부터 혁재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혁재는 제대로 먹어보지도, 따뜻한 말을 들어 보지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보지도 못했다. 구조 당시 17개월이었던 혁재의 몸무게는 5kg으로 또래 남자 아이들의 절반에 불과했다.
아이가 보배인 저출산 시대에도 ‘품을 잃은 아이들’이 있다. 친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유기된 아이들. 그리고 부모가 방임한 아이들까지.
올해 출생신고를 의무화하되 ‘익명 출산’을 허용하는 두 법이 국회를 통과했지만 우리 주위엔 여전히 미아처럼 품을 찾아 떠도는 아이들이 있다.
[2] 차가웠던 부모의 품
‘내가 잘 결정한 걸까….’
2주 전 정선은 센터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부모의 방임으로 갈 곳이 없어진 아이를 어른이 될 때까지 키워 달라는 부탁이었다. 이미 2017년부터 아이 한 명을 위탁받아 키우고 있던 ‘경험자’ 정선에게 다시 요청이 들어온 것이다.
센터 직원에게 “생각 좀 해볼게요” 하며 일단 전화기를 내려놓고, 정선은 한동안 깊은 생각에 빠졌다.
“엄마, 우리가 하면 안 돼? 내가 많이 도와줄 테니까 우리가 데려오자.”
아파본 사람이 남의 아픔을 알아본다고 했던가. 다정이 덕분에 다시 용기를 냈다. 하지만 이번 아이는 상황이 녹록지 않아 보였다. 휴대전화 벨소리에 정선은 현실로 돌아왔다.
“아이 왔습니다! 센터로 올라오시면 됩니다.”
외할아버지는 눈물을 훔치며 혁재를 건넸다. 빼빼 마른 아이는 신생아처럼 가벼웠다. 정선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팔은 무게추를 단 듯 쑥 내려갔다. 묵직한 책임감이 두 팔을 짓눌렀다. 정선과 혁재는 그렇게 가족이 됐다. 혁재가 죽음의 문턱에서 구조된 지 한 달 만이었다.
혁재가 친부모, 누나 재은과 함께 살던 원룸 인근. 구급차가 정차한 골목 안쪽에 네 사람이 함께 살던 원룸이 있다. 구조 직전까지 혁재의 세상은 원룸 안 작은 매트리스에 갇혀 있었다.
혁재 엄마 김유민(가명)은 당시 스물 한 살이었다. 김유민의 부모는 불화가 심했고, 어린 김유민은 할머니에게 떠넘겨졌다. 학교에서는 왕따를 당했다. 중학교 3학년, 졸업도 포기하고 자퇴하겠다는데도 김유민을 붙잡는 교사는 없었다.
김유민은 못 받은 사랑을 남자들에게 갈구했다. 18세 때 만난 남자와 첫 딸 재은(가명)을 낳고 성인이 되자마자 혼인신고를 했다. 훗날 김유민을 변호한 김태엽 변호사는 “자기한테 관심을 가져주고 본인을 지켜줄 수 있다고 얘기해 주는 남성들에게 너무너무 심하게 의존했다”고 했다.
첫 결혼은 오래가지 못했다. 경제능력이 없는 남편에게 실망한 김유민은 이혼도 하지 않은 채 집을 나왔다. PC방을 전전하던 김유민 앞에 나타난 건 일곱 살 연상 임훈석(가명)이었다. 그는 부모가 이혼한 뒤 보육원에서 자랐다. 성인이 되면서 보육원을 나왔고, 자립정착금을 받아 독립했다. 김유민은 딸을 데리고 그와 동거를 시작했다.
동거 7개월 만인 2020년 9월 29일 혁재가 태어났다. 하지만 아이가 생겼다고 달라진 건 없었다. 두 사람은 여전히 PC방을 전전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했다.
방임이 알려질까 겁난 김유민은 2021년 6월 30일부터 딸을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았다. 그리고 0~6세 아동을 가정에서 돌보는 부모에게 지급되는 양육수당을 받았다. 울산 남구청은 재은이 앞으로 총 270만 원, 혁재 앞으로 330만 원을 지급했다. 아동수당 10만 원도 매달 입금됐다. 만 8세 미만 대한민국 국적 아동 모두가 받는 돈이다. 32개월 동안 재은이 앞으로 320만 원, 18개월 동안 혁재 앞으로 180만 원을 받았다. 양육·아동수당은 부부의 식비와 PC방비, 담뱃값, 강아지 두 마리 사료비와 미용비로 지출됐다.
2021년 10월부터 아이들은 더 방치됐다. 부부는 ‘관계 악화’와 ‘육아 스트레스’를 핑계로 각각 자주 외출했다. 재은이는 하루에 한 끼를 가까스로 먹었다. 라면 국물에 만 밥이나 아빠가 남긴 반찬이 대부분이었다. 혁재는 아주 가끔 분유만 먹었다.
부부가 아이들을 전혀 돌보지 않아도 수당은 문제없이 지급됐다. 현행 아동수당법은 아동수당을 받는 아동이 제대로 부모의 양육을 받고 있는지 관리·감독하는 내용이 빠져 있다. 지자체는 재은이와 혁재의 상황을 알아차리지 못했고,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지난해 3월 3일 부모와 살던 원룸에서 의식을 잃은 채 발견된 재은(가명)이가 울산 중구 동강병원 응급실로 실려가고 있다. 발견 당시 영양실조와 뇌출혈이 심각했던 재은이는 끝내 우리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날 누나와 함께 있다 구조돼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혁재는 한 달 후 위탁가정을 만나 마침내 세상으로 나왔다. 동강병원 제공
이사 34일째. 외출했다 돌아온 임훈석은 오후 7시 2분경 냉장고 앞에 쓰러져 있는 재은이를 발견했다. 허기에 시달리다 박스들을 밀어내고 가까스로 매트리스를 탈출했지만 끝내 냉장고 문을 열지 못한 채 쓰러졌고, 오후 8시 5분 31개월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영양실조와 뇌출혈. 부검 결과 위 안에는 당근 1조각만 있었고, 사망 당시 키는 78.3cm, 몸무게는 6.5㎏였다. 또래 여아의 표준 체중의 절반에 불과했다.
한 달간 몸무게가 회복돼 7.8㎏까지 늘어났다. 그러나 17개월간 멈췄던 성장이 쉽게 재개되진 않았다. 보통 아이들은 생후 4~6개월부터 이유식을 먹지만, 부모가 혁재에게 준 음식은 분유뿐이다. 혁재가 김유민, 임훈석과 함께 살던 2021년 2월 의사가 “아이 몸무게가 잘 늘지 않으니 큰 병원에 가 보라”며 진료의뢰서를 써줬지만, 부부는 이를 무시했다. 그해 7월 이후로는 병원도 가지 않았다.
혁재는 말을 배운 적이 없었다. 그래서 혁재는 말 대신 비명으로 의사소통을 했다. 엄마, 아빠 등 여러 단어를 구사할 나이였지만 입에서 나오는 소리는 오직 “으아아아” 뿐이었다. 이름을 부르고 말을 걸어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혁재에게 걸음마도 연습시키지 않았다. 다리와 허리에 힘이 없는 혁재는 어딘가에 늘 비스듬히 기대앉았다. 기는 대신 엉덩이로 다리를 밀면서 다녔다. 또래 아이들이 뒤집기에 성공하고, 첫걸음을 떼고, 처음으로 “엄마”를 불러 기념했을 순간들이 혁재에겐 없었다. 김유민과 임훈석은 혁재에게 밥만 주지 않은 게 아니라 미래도 앗아갔다.
혁재와 다정이가 함께 생활하는 방. 다정이는 혁재가 오면서 혼자 쓰던 방 절반을 혁재를 위해 내어 줬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니까. 이 정도는 견디자….’
그때 혁재의 울음소리 사이로 조용히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정이었다.
“엄마 미안해, 우리 엄마 불쌍해 죽겠어. 내가 괜히 혁재 데려오자고 해서 엄마가 고생하는 것 같아. 나 때문에….”
정선은 벌떡 일어나 다정이 방으로 달려갔다. 다정은 엉엉 소리도 내지 않은 채 이불을 뒤집어쓰고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정선은 “엄마, 미안해”를 반복하는 다정이를 꼭 껴안았다.
“괜찮다, 엄마는 괜찮아. 고마워 다정아.” 정선도 함께 울었다.
실제 만나보니 안 아픈 곳이 없는 아이였다. 울산대병원엔 주 2회 꼬박꼬박 발도장을 찍었다. 진작 마쳤어야 했던 예방접종도 1주일에 3번씩 맞았다. 지난해 추석에도 혁재를 안고 병원을 찾아다녔다. 천식 발작으로 제대로 호흡하지 못하며 밤새도록 설사를 해서다.
집에서 해내야 할 일들은 더 큰 숙제였다. 의료진은 “당장 삼키질 못해도 주르륵 흐르는 미음이 아니라 현미밥처럼 ‘꼬들꼬들’한 음식을 자꾸 씹어야 한다”며 ‘씹는 연습’을 시켜야 한다고 당부했다.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정선은 처음으로 이유식이란 것을 만들었다. 친아들에겐 집밥조차 제대로 해준 적이 없었다. 장사를 하느라 늘 바빠 아들 손에 용돈을 쥐어주며 “밖에서 사 먹어라”고 했던 그였다.
정선이 애쓰는 동안 혁재는 억눌린 감정을 표출했다. 소파 밑, TV장 밑엔 혁재가 던진 포크들이 굴러다녔다. 말로 표현을 하지 못할 뿐 화가 많았다.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던지고 사람을 깨물었다. 정선은 혁재가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한 탓에 감정 표현을 하는 법을 모르는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바로잡아야 할 건 바로 잡는 게 ‘위탁 엄마’가 할 일이었다.
혁재는 정선과 가족이 된 지 두 달 만인 6월부터 어린이집에 등원했다. 혁재는 자기 몸만한 어린이집 가방을 메고 매일 아침 씩씩하게 어린이집에 간다. 처음 등원할 때는 친구들보다 ‘머리 하나’ 정도 키가 작았지만, 쑥쑥 자라 지금은 비슷해졌다.
“제대로 걷지도 몬하고 아직도 궁디이만 끌고 댕기는데, 아한테 장애가 있는 거 아이가?”
주위 사람들은 속도 없이 보챘다. ‘장애가 있으면 있는 대로 열심히 살면 되지. 내 아인데 기꺼이 받아들일 거야.’ 정선은 속으로만 답했다.
두 달 뒤 혁재는 자기 힘으로 첫발을 내딛었다. 하지만 똑바로 걷지는 못했다. 뒤뚱거리는 아이를 붙잡고 정선은 주문을 외듯 말했다. “괜찮다. 우리 아들은 잘 걸을 거야. 아직 서툴고 힘이 없어서 그래.” 매일 밤 혁재의 다리를 몇 시간이고 주무르고, 굽혔다 폈다 하면서 빌었다. 혁재가 신나게 뛰어다닐 수 있도록, 다리에 힘이 생기게 해 달라고.
정선과 가족들은 SNS에 ‘복덩이 혁재 우리 집으로 오다’라는 폴더를 만들었다. 이 폴더에는 혁재가 집에 왔을 때부터 현재까지 자라온 과정들이 영상과 사진으로 담겨 있다. 정선이 다정이가 가르쳐 준 태권도 품새를 따라하는 혁재 영상을 보고 있다.
혁재가 어린이집에 간 지 두 달 만인 8월. 교사가 정선에게 동영상을 보여줬다. 혁재가 물병에 달린 빨대로 물을 마시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너무나 평범해 보이는 아이의 모습에 정선은 왈칵 눈물이 터졌다.
분유 하나만으로 생명을 지탱해온 혁재. 살기 위해 젖병에 집착할 수밖에 없었던 아이. 텅 빈 젖병을 뜯어대느라 젖꼭지 부분이 며칠 만에 해지곤 했다. 그랬던 혁재가 처음으로 다른 도구를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는데 필요한 행위를 스스로 해냈다는 대견함, 앞으로 찾아올 어려움도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을 거란 안도감에 비로소 긴장이 풀렸다. 정선은 혁재와 함께한 모든 순간 중에서 그 순간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어머니, 진짜 제가 잘 키워볼게요. 혁재가 저한테 온 것도 인연일 텐데 정말 최선을 다해서 정성껏 키울게요.” 교사와 정선은 서로를 붙잡고 엉엉 울었다.
혁재는 이제 건강하게 뛰어다니는 네 살 어린이가 됐다. 정선은 매일 오후 3시 혁재를 데리러 어린이집에 간다. “혁재야, 엄마 왔다!” 정선이 문 앞에서 큰소리로 외치면 혁재가 튼튼한 두 다리로 전속력으로 달려와 안긴다. 뜀박질하는 걸음마다 바가지 모양 머리칼이 휘날리는 게 그렇게 이뻐 보일 수가 없다. 고작 6시간 떨어져 있었을 뿐인데, 며칠은 떨어졌다 만난 것처럼 두 사람은 서로를 꼭 껴안는다.
정선이 혁재가 어린이집에서 만든 갓을 보여주고 있다. 혁재가 처음 정선과 가족이 됐을 때는 소근육에 문제가 있을 수 있으니 정밀 검진을 받아보라는 권유를 받기도 했다. 이제 혁재는 좋아하는 인형이 찢어지면 직접 스카치테이프를 가져 와 수선을 해 줄 정도로 가위질을 잘 한다.
저녁은 꼭 상섭(아빠) 옆에 달라붙어 먹는다. 아빠가 먹는 음식도 다 좋아한다. 정선은 혁재의 배를 신기하게 바라보며 살살 문지른다. 어른 손바닥 2개로 가려지는 작은 배에 그 많은 음식이 들어가는 게 신기해서다. 볼록 나와 있던 배는 자고 일어나면 쑥 들어갔다. 혁재의 몸무게는 2년 반 만에 세 배 넘게 ‘폭풍성장’ 중이다.
김유민의 어머니는 자신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라며 자책했다. 김유민이 아이였을 때 직접 키웠더라면, 사랑을 더 많이 줬더라면 딸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란 후회가 그를 뒤덮었다. 그는 “아이(재은이)에게 미안하고 죄스럽다”고 한탄했다.
정선은 김유민이 안타까울 뿐 다른 감정은 없다고 했다. “부족한 어미지만…. 그 어린 아이(김유민)가 뭘 알았겠어요. 가정이 안 좋으니까 집을 나와서 살았고, 열심히 사는 법을 못 배웠을 거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을 거고…. 세월이 흐르면 자기 잘못을 뉘우치겠지요.” 정선은 “혁재는 지금 아주 건강하다고, 엉덩이에 살도 흐르고 너무 좋다고 얘기해 주고 싶다”고 덧붙였다.
정선이 혁재가 가장 좋아하는 장난감인 트럭을 들어 보이고 있다. 정선과 만날 때만 해도 걷지 못했던 혁재는 이제 트럭을 밀면서 ‘붕붕’ 소리를 내며 뛰어 다니는 건강한 어린이가 됐다.
사랑을 받기만 원할 줄 알았는데, 언제부턴가 우리가 혁재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지난달 3일 부산 해운대구 이숙진 씨(가운데) 자택에서 이 씨와 큰 딸 이사랑 양(오른쪽), 위탁 아동 아랑 양(가명·왼쪽)이 부산시가정위탁지원센터가 준비한 선물을 열어보고 있다. 아랑 양은 친모의 유기로 생후 7개월 때 가정위탁을 통해 이 씨와 가족이 됐다. 그러나 이 씨는 법적으로 아랑 양의 ‘동거인’에 불과해 병원 진료, 해외 여행 등에서 제약이 많다.
가정위탁은 아동 학대나 경제적 사정, 이혼 등으로 친부모가 아이를 직접 키울 수 없는 경우 다른 가정이 돌보도록 하는 제도다. 원칙적으로는 친부모의 상황이 나아지면 원래 가족으로 돌아가는 게 목적이다. 친부모의 상황이 개선되지 않으면 만 18세가 될 때까지 위탁 가정에서 지낼 수 있다. 가정의 돌봄이 절실한 아동과, 아이를 돌볼 수는 있지만 입양까진 어려운 가정을 맞춤형으로 연결하는 제도인 셈이다.
위탁 부모가 되려면 소득 등 조건을 갖춰야 하고, ‘예비 위탁부모 교육’을 이수해야 한다. 위탁 아동은 기초생활수급자로 선정돼 월 30만~50만 원의 양육보조금을 받는다. 위탁 부모 경력 3년 이상 등 일정 조건을 충족하면 학대를 당한 아이나 장애가 있는 아이, 36개월 미만 아이도 받을 수 있다. 이 경우 월 100만 원을 추가로 더 지원한다.
지난달 3일 부산 해운대구 이숙진 씨 자택에서 남편 이상범 씨(오른 쪽)가 해먹에 누워 두 번째 위탁 아동 준이(가명)를 돌보고 있다. 준이는 두개골이 비대칭을 이루는 사두증으로 교정 헬멧을 착용하고 있다.
친권이 없는 위탁 부모는 어려움이 많다. 36개월 아랑(가명)이를 7개월 때부터 위탁받아 키우고 있는 이숙진 씨(43)는 아버지 칠순을 기념해 해외여행을 계획했다. 그러나 친부모의 동의 없이는 영문가족관계증명서가 발급이 안 돼 아랑이와 남편은 국내에 남았다. 친부모는 연락이 두절된 상태다. 이 씨는 “휴대전화 개통, 보험 가입도 불가능하다. 학교 갈 날이 다가올수록 답답한 마음이 커져간다”고 했다.
김민정 세이브더칠드런 부산가정위탁지원센터장은 “위탁 부모들이 아이를 기르는 동안이라도 병원 입원이나 수술 등 친권이 필요한 상황에서 친권을 대리 행사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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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장: 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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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부산=조유라 기자 jyr0101@donga.com
울산·부산=조민기 기자 mink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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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 기자 suwoong2@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