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터 마누엘 로차 전 주볼리비아 미국대사가 올 6월 쿠바 공작원으로 위장한 미 연방수사국(FBI) 요원과 만나 40년간의 쿠바 스파이 활동에 대해 “그랜드슬램 이상”이라고 말하는 장면. 미국 법무부 제공
“(쿠바 총첩보국) 마이애미 지부 미겔이라고 합니다. 아바나(쿠바의 수도)에 있는 당신의 친구들로부터 메시지가 있습니다. 제가 당신의 새로운 접촉 포인트입니다.”
“미겔이라고 했나? 나는 ‘아바나’ 이런 표현 안 써. 그냥 ‘그 섬(The Island)’이라고 하지. 뭘 적지도 않아. 꼬리가 잡히니까.”(로차)
신광영 국제부 차장
“(이 일을) 몇 년이나 하신 건가요?”(미겔)
“거의 40년.”(로차)
“와우… (쿠바와) 오랜 기간 우정을 지켜주셨네요.”(미겔)
“쉽지 않았지. 많은 걸 희생했고…. 한순간도 긴장을 놓은 적이 없어. 나에 대한 통제력을 잃으면 안 되니까. 그래도 신념이 있으면 정신을 붙잡게 돼.”(로차)
“(쿠바) 본부와 마지막으로 닿은 게 2017년쯤이었어. 보통의 삶으로 돌아가 있으라더군. 그 후로 난 우익 인사로 살았지. 그게 내 레전드(legend)야.”(로차)
‘레전드’는 비밀요원이 정체를 숨기려 만들어낸 캐릭터를 뜻하는 은어다. 로차는 2002년 주볼리비아 미국대사 퇴직 후에도 쿠바를 관할하는 미 남부사령부 고문으로 6년 넘게 활동하며 군사기밀에 접근했다. 로차는 미겔에게 “젊은 요원을 보게 돼 뿌듯하다”며 회한에 잠긴 듯 ‘나 때는’ 발언을 이어갔다.
“우리가 해온 일들은 정말 대단했어. 그랜드 슬램(세계 4대 테니스 대회인 호주오픈, 프랑스오픈, 윔블던, US오픈에서 모두 우승하는 것) 이상이지. 그들(미국)은 우리를 과소평가했어.”
쿠바가 훔친 정보는 쿠바 안에 머물지 않는다. 우방인 러시아, 중국, 북한 등으로 흘러갈 수 있다. 미국의 봉쇄로 경제가 어려웠던 쿠바는 구소련에 크게 의지했다. 정보기관도 KGB로부터 훈련과 지원을 받아 운영됐다. 냉전 후에도 KGB 출신인 블라디미르 푸틴이 집권하면서 정보 공조는 지속됐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자 미 플로리다에서 불과 150km 떨어진 쿠바 해안에 정보 시설을 다시 열었다. 쿠바에 막대한 지원을 해온 ‘최대 채권국’ 중국도 미국을 겨냥한 정보 기지로 쿠바를 활용하고 있다. 신냉전의 핵심 교두보로 급부상하는 쿠바를 미국은 ‘지나간 적’으로 여기며 방심했다.
“본부에서 확인하려는 사항이 있습니다. 당신이 여전히 우리와 함께하길 원하는지 궁금해합니다.”(미겔)
“그런 걸 물어온다니 화가 나는군. 마치 내가 남자가 맞느냐고 묻는 거니까. 바지를 내려서 성기를 보여 달라는 말이나 다름없어.”(로차)
두 사람의 대화는 미 연방검찰 공소장에 녹취록으로 첨부돼 있다. 로차는 40년간 숨겨 온 정체를 연방수사국(FBI) 위장 요원인 미겔에겐 미처 감추지 못했다. 세 번째 접선 후 체포된 로차는 미겔과의 만남 자체를 부인하다 둘이 나란히 찍힌 사진을 수사관이 들이밀자 입을 닫았다. 메릭 갈런드 법무장관은 4일(현지 시간) 로차를 간첩 혐의로 기소하면서 “외국 요원이 미국 정부의 최고위직에, 가장 오래 침투한 사건”이라고 했다. 로차는 내년 초 마이애미 법정에 선다.
신광영 국제부 차장 n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