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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영국 크리스마스’ 보내기[폴 카버 한국 블로그]

입력 | 2023-12-21 23:30:00


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올해는 가뜩이나 시간이 빨리 지나간 느낌이다. 며칠 있으면 크리스마스다. 크리스마스는 전 세계적으로 거의 보편적으로 기념되는 명절이기는 하지만 나라마다 이날을 보내는 방식은 천차만별이다. 한국은 커플 기념일에 가깝고, 바로 옆 나라 일본은 글로벌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에서 프라이드치킨 한 통을 먹는 날이다. 저 멀리 아이슬란드는 크리스마스에 서로 책을 주고받는다 하고, 베네수엘라는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교회로 가서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내 고향 영국에서는 큰 가족 잔치에 가깝다. 한국의 설날이나 추석과 비슷한 개념이 아닐까 싶다.

폴 카버 영국 출신 번역가

나는 올해 크리스마스는 한국에서 맞이한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으레 집착하던 일들을 할 사이도 없이 바빠서였는지 영 크리스마스 ‘삘’이 오지 않았다. 얼마 전 업무 관계로 인터뷰차 서울 종로 쪽에 나갈 일이 있었는데, 각종 크리스마스 장식과 트리, 영화를 보자 마치 시간 여행을 하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집에 와서 건너편 집 트리를 보자 왠지 꿀꿀한 기분이 들어서 1년 동안 구석에 처박혀 있던 플라스틱 크리스마스트리를 꺼내 거실 한편에 세웠다. 그런데 기분 탓인지 크리스마스트리 불빛마저 우울해 보였다.

그래도 이왕 시작한 거 제대로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려면 영국식 크리스마스 정찬에 필요한 식재료를 준비하는 순서가 남았다. 지금의 한국은 영국 크리스마스 디너 메뉴 음식을 사는 일이 그다지 어려운 곳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2007년 7월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영국을 떠나 한국에 상륙했다. 한국에서 첫 번째 크리스마스를 맞게 되었을 때 난 아이들에게 영국 크리스마스 향수를 달래주기 위해 크리스마스 디너를 손수 만들어 주기로 마음먹었는데, 그 당시는 한국에서 영국식 크리스마스의 재현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일단 메인 요리인 칠면조를 대형마트에서조차 살 수가 없었으며, 방울양배추, 영국식 베이컨, 스터핑을 위한 밀가루, 그레이비소스 등을 찾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심지어 크리스마스 장식을 위한 포장지, 상자, 리본 등을 찾는 것도 어려웠다. 그제야 설날이나 추석에 재외 한인을 위한 파티를 열려고 애쓰는 여러 영국 한인 사회에 대해 깊은 경외심을 느낄 수 있었다.

16년이 지난 한국은 많이 바뀌었고, 나도 여러모로 빠르게 진화해서 한국에서 영국 크리스마스 지내기 프로젝트에 어느 정도 달인이 되었다고 자부한다. 영국 커뮤니티 채팅그룹에서 활동해 왔던 나는 영국 크리스마스 재현 방법에 대한 팁을 영국 동포 여러분과 공유해 왔는데, 크리스마스 디너의 대표적 야채인 파스닙(작은 무같이 생긴 야채)을 구할 수 있는 온라인 상점, 재림절 달력을 파는 상점, 그레이비소스 대체재 및 여러 외국 대사관에서 개최하는 크리스마스 마켓에 대한 정보 등등이 그 예다. 이렇게 마련한 한국의 영국식 크리스마스는 이제 복제율 90% 이상을 자랑하는 수준이 되었지만, 여전히 실천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닌지라 크리스마스 시즌에 영국행을 선택하는 영국 동포들이 아직 많은 것이 현실이다. 오후 4시만 돼도 어둑어둑해지고 겨울에 습기가 많은 기후 때문에 온도가 한국보다 높아도 그 추위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그런 영국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위해 10시간이 넘는 비행을 불사하는 영국인들이 많다는 것은 크리스마스가 이 종족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날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리라.

더 완벽한 영국식 크리스마스를 재현하기 위해 모자라는 10%의 복제율을 어떻게 끌어올릴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았다. 지금은 한국에서 살 수 없는 물품인데 아마도 크리스마스 크래커가 필수적일 듯하다. 그리고 머라이어 케리 캐럴 대신 위저드의 ‘I wish it could be Christmas every day’나 슬레이드의 ‘Merry Christmas everybody’를 틀면 좋을 것 같다. 무엇보다 크리스마스 숙취를 해결하고 내수 진작을 위한 쇼핑도 할 수 있는 12월 26일 박싱데이(Boxing Day)를 연휴로 지정하면 보다 더 완벽하고 행복한 크리스마스가 되지 않을까.

그러나 한국에서 이런 완벽한 영국식 크리스마스를 요구하는 것은 억지스러운 일일 것이다. 살짝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즐기는 걸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혹시 영국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한국분들이 계신다면 저 대신 맘껏 즐기시길 바라면서, 한국 독자 여러분 모두에게 Merry Christmas!(그러나, 혹시 저처럼 크리스마스 ‘삘’이 안 나시는 분들이라면, 스크루지 방식으로 “Bah, Humbug!”)





폴 카버 영국 출신 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