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four)에버 육아’는 네 명의 자녀를 키우며 직장생활을 병행하고 있는 기자가 일상을 통해 접하는 한국의 보육 현실, 문제, 사회 이슈를 담습니다. 단순히 정보만 담는 것을 넘어 저출산 시대에 다자녀를 기르는 맞벌이 엄마로서 겪는 일화와 느끼는 생각도 공유하고자 합니다.
영화 ‘서울의 봄’의 누적 관객은 930만 명을 넘어서 현재 추세라면 크리스마스 연휴에 올해 두 번째 천만 영화 기록을 세울 것으로 보인다. 21일 서울 시내 한 영화관에 영화 ‘서울의 봄’ 포스터가 걸려있다. 뉴시스
영화를 계기로 ‘전두광’의 실제 인물인 전두환과 제5공화국도 다시 조명되고 있다. 전두환은 평생 논란을 몰고 다닌 대통령이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강경 진압해 수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그에 대해 일말의 사과나 반성도 없어 전 국민의 공분을 샀다. 퇴임 후 재판을 통해 재임 기간 벌인 각종 비리가 드러나 수천억 원을 추징당했는데, ‘전 재산은 계좌에 든 29만 원뿐’이라는 희대의 망언을 남기며 납부를 거부해 거센 비난을 받았다.
● 1980년 전후로 둔화한 출산율 감소, 조급해진 정부
1·4 후퇴 당시 피난 가는 한 가족의 모습. 동아일보DB
인구 증가율을 0%로 만드는 합계출산율, 즉 인구가 다음 세대에도 현 세대와 똑같게끔 만드는 출산율을 ‘대체 수준 출산율’이라 부르는데, 일반적으로 영아사망률이 낮은 선진국에서 이 대체 수준 출산율은 2.1명 정도다. 1980년을 전후해 한국의 출산율은 이 수치에 근접한다. 1981년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2.57명이었다.
하지만 출산율이 떨어지니 자연히 감소 폭이 둔화하고 가족계획 사업 분위기도 다소 시들해질 수밖에 없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대체 수준 출산율 달성을 눈앞에 두고 마음이 조급해진 공무원과 전문가들에겐 당연해 보이지 않았다. 이들은 시대가 변함에 따라 가족계획 사업 방식 한계를 드러내고 있음에 주목했다. 그동안의 가족계획 사업이 높은 성과를 보일 수 있었던 건 인구 정책에 무지했던 국민을 대상으로 한 계몽 교육과 피임 지원, 지역별 전담 요원들이 가가호호 방문해 집중관리하는 ‘도어 투 도어’ 사업 방식 덕이었다. 하지만 1980년대에 이르면 이미 많은 국민들이 가족계획의 필요성을 깨달아 더 이상 ‘덮어놓고 낳아봐야 거지꼴을 못 면한다’고 계몽할 사람도 없었고, 도시화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과거처럼 도어 투 도어 방식 관리도 어려워졌다.
● 2050년 인구 6000만 전망…전두환 “인구문제, 5공 역점사업”
여기에 잘못된 전망까지 기름을 부었다. 1981년 정부가 낸 ‘장기 인구 전망’은 당시 속도대로 출산율이 떨어질 때 2000년에야 겨우 출산율이 2.1명에 이르고 이후 출산율이 계속 정체해 2050년 인구가 6000만 명을 넘는다고 예측했다.
기존 인구 정책에 따른 예기치 않은 부작용까지 감지됐는데, 바로 남녀 성비 불균형이었다. 정부의 지원 혹은 묵인하에 피임과 임신중절이 늘면서 자녀 수는 2~3명으로 줄었지만, 그 안에서 남아선호사상에 따른 성비 불균형이 극심해졌다. 태어나는 여아 100명에 대한 남아 수를 일컫는 출생성비는 자연 상태에서 105명 전후다. 하지만 통계청에 따르면 1975년 출생성비는 112.4명, 1978년 111.3명으로 남아가 비정상적으로 많았다. 이런 기울어진 성비는 장기적으로 사회를 불안하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결국 당시 정부는 억제 정책을 더욱 보완·강화하고 그 방식을 개선하는 대대적인 전환에 들어간다. 사실 집권 초만 해도 인구 정책에 큰 관심이 없었던 전 대통령은 뒤늦게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듣고 “문제가 심각하다”며 그 자리에서 책상을 탁 치더니 “인구 문제를 제5공화국의 역점사업으로 하자”고 말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지방에 초도순시를 다닐 때도 인구 억제를 강조하며 본인이 군대에 있을 때 정관수술을 했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1960, 1970년대 가족계획 사업의 일환으로 군부대 의무시설에서 희망자에 한해 정관수술을 지원했다), 상대방에게 ‘당신도 했느냐’고 묻곤 했다는데, 이 때문에 눈치를 보던 청와대 비서관이 마지못해 정관수술을 했다는 일화도 전해온다.
● “셋 이상 낳으면 보조금, 수당 안줘” 인구억제 강화
재임 당시 경제 동향 보고를 받고 있는 전두환 대통령. 동아일보DB
―의료보험 급여 대상에 피임 시술 포함, 시술 지원비 인상
―의료보험 분만급여 지급 대상을 둘째까지로 제한
―셋째부터 자녀 교육비 보조금 비과세(면세) 혜택 박탈
―셋 이상 다자녀 공무원 가구에 자녀 학비 보조수당, 가족수당 미지급
―영세민 생계비, 자녀 수따라 차등 지급(한 자녀 30만 원, 세 자녀 3만 원)
―생업자금, 복지주택자금 융자 시 두 자녀 불임수용 가구 우선
―두 자녀 불임수용 가구에 공공주택 입주 우선권, 0~5세 자녀 1차 무료 진료
―호주제, 상속제에 여성 차별 조항 개선
―여성 취업 금지 직종 30→6종
―육아휴직제 제도화
―학교 인구 교육 보완, 강화
대한가족계획협회가 광고했던 표어. 동아일보DB
● ‘승자의 저주’…역사의 교훈
보건복지부가 전문가들과 함께 저출산 관련 간담회를 열고 있는 모습. 뉴시스
80년대 중반, 전망이 현격히 어긋난 걸 알았을 때 슬슬 브레이크를 밟았어야 했다. 사실 이미 우리보다 앞선 길을 갔던 선진국은 저출산 위기를 이야기하고 있었고, 국내서도 향후 고령인구 증가, 노동력 부족을 지적하는 학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인구 정책 목표 달성에 취한 정부는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다. ‘승자의 저주’였다. 당시 브레이크를 밟았더라면 지금의 저출산 상황이 좀 달라졌을까? 역사에 가정법이 의미 없다는 걸 알지만, 당시 ‘골든타임’을 허비하지 않았다면 적어도 세계 최저 출산율이란 불명예 타이틀은 달지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억제 정책을 중단해야 한다’는 의견과 ‘상황을 더 지켜봐야 한다’는 의견 사이에서 10년이 더 허비되었고, 최종적으로 정부가 인구 억제 정책을 폐기한 것은 1995년에 이르러서였다.
역사를 되돌릴 순 없어도 역사에서 교훈을 얻을 순 있다. 상황에 대한 정확한 조사와 판단, 필요할 때 과감한 정책 전환. 서울의 봄에서 전두광은 쿠데타가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이라고 말한다. 12·12는 잠시 혁명이었는지 몰라도 결국엔 반란으로 기록됐다. 당시 성공이라 자축했던 5공의 인구 정책도 이제 보니 재앙의 씨앗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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