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감원, 교보·미래에셋·유진·하나·한국투자·키움·NH투자·KB·SK증권 임직원 30명 검찰 통보
“최근 금감원의 채권형 랩·신탁 잠정 검사 결과를 보고 깜짝 놀랐다. 모든 금융상품은 근본적으로 시장 논리에 따라 수익률이 결정돼야 하는데, 증권사가 자기자본으로 특정 고객의 CP(기업어음)를 고가에 사주는 등 위법 행위를 한 것을 ‘관행’이라며 정당화할 수는 없다. 이 정도 규모의 행태는 대표이사를 비롯해 경영진의 개입이나 묵과가 없이는 이뤄지기 어렵다고 본다.”
6000번 거래로 5000억 손실 떠넘긴 사례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금융감독원 청사. [동아DB]
고객이 일정 수익률 요구했을 것으로 추측
금융감독원은 교보·미래에셋·유진·하나·한국투자·키움·NH투자·KB·SK증권 등 국내 9개 증권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채권형 랩·신탁 잠정 검사’ 결과 다수의 위법 행위를 적발했다. [각 사 제공]
금감원이 밝힌 증권사 위법 행위의 구체적 행태는 이렇다. 가령 A 증권사는 만기가 가까워진 상황에서 특정 고객 계좌에 손실이 생기자 해당 계좌에 있는 CP를 B 증권사에 비싼 값에 팔아 수익률을 높였다. 그 대신 만기 여유가 있는 다른 고객 계좌에서 B 증권사의 CP를 비싸게 샀다. 특정 고객의 수익률을 높여주려고 다른 고객이 손실을 보게 만든 것이다. 일부 증권사는 다른 증권사와 이런 방식으로 6000번 넘게 거래하면서 고객 간 5000억 원 규모의 손익을 돌려막기했다. C 증권사의 경우 다른 증권사에 있는 자사 계좌에서 특정 고객의 CP를 비싼 값에 사 결과적으로 1100억 원 규모의 이익을 제공했다. 증권사가 이런 위법 행위를 하는 데 대표이사를 비롯한 주요 경영진이 관여했다는 게 금감원 측 판단이다. 이 같은 제3자 이익 도모, 사후 이익 제공 등은 자본시장법 위반 소지가 있는 행위다. D 증권사는 당초 고객과 만기가 1년 미만 남은 채권으로 계좌를 운용하기로 계약했으나 실제로는 만기가 4년 남은 채권을 편입해 운용했고, E 증권사는 계약보다 신용등급이 낮은 회사채를 편입해 운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금융업계 한 관계자는 “일부 직원이 사내 분위기에 휩쓸려 위법인 줄 몰랐을 수도 있으나 증권사 차원의 컴플라이언스 체계 자체가 작동하지 않은 것은 의아하다”면서 “위법 행위로 높아진 수익률을 보고 누군가는 혹해 투자했을 개연성이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과장광고로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업계 안팎에서는 증권사들이 위법 행위를 감수하면서까지 랩·신탁을 무리하게 운용한 데는 투자자 요구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금감원이 이번 검사 결과와 관련해 배포한 보도자료에는 ‘투자자 당부사항’이라는 대목이 있다. “랩·신탁은 실적배당상품이므로 증권사에 과도한 목표수익률 제시를 요구하거나 이를 신뢰해서는 안 된다” “투자손실 보전 또는 목표수익률 보장을 요구하는 행위는 투자자 자기책임원칙에 반하여 법상 허용되지 않는다”는 게 뼈대다. 금감원 관계자는 “랩·신탁 고객이 증권사에 일정 수익률을 요구하거나 압박하지 않았을까 추측하고 있다”면서 “금융사뿐 아니라 투자자의 주의도 요구된다”고 말했다.
〈이 기사는 주간동아 1420호에 실렸습니다〉
김우정 주간동아 기자 frien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