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작가가 태어난 전남 신안군 안좌도의 생가 명당 터. 작가가 유년기까지 보낸 이곳의 생기는 그의 작품에까지 연결돼 있다.
한국 추상 미술의 거장으로 평가받는 김환기(1913-1974)의 그림은 예술풍수적 감각으로 볼 때 일관된 기운이 느껴진다. 2017년 65억5000만원에 낙찰돼 한국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를 기록한 ‘고요’를 비롯해 ‘붉은 점화’ ‘우주’ 등 그의 유작에는 솟구치는 생명력과 넉넉한 풍요의 기운이 배어 있다.
묘하게도 김환기의 작품 속 기운은 그가 태어난 생가의 기운과도 연결된다. 김환기는 전남 신안군의 섬 안좌도에서 부농(富農)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 유년기까지 보냈던 생가 터는 강력한 지기가 형성된 명당이다. 생명력을 상징하는 목(木)기운과 풍요를 상징하는 토(土)기운이 적절히 조합된 명당 터의 기운은 그의 작품 속 기운의 원천(源泉)이라고 할 수 있다.
디지털 아트, 진짜와 가짜의 경계선
흔히 작가 정신, 예술혼 등으로 묘사되는 작품 속 기운은 예술풍수론에서는 ‘영기(靈氣)’라는 단어로 표현된다. 중국의 미술전문가 딩시위안(丁羲元)는 저서 ‘예술풍수’에서 “영기가 있는 그림은 보는 이의 눈길과 마음을 사로잡는다”고 하면서 이는 작가의 천부적인 기질과 수양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했다. 여기서 천부적인 기질은 타고난 풍수적 혹은 유전적 배경을 가리키며, 수양은 갈고 닦은 예술적 완성도를 의미한다.
이와 관련해 작가 정신, 혹은 작품 속 영기에 주목한 젊은 작가가 눈에 띈다. 세계적인 아트페어인 프리즈(Frieze)에서 ‘디지털 파트너쉽’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공식적으로 등장시킨 김대환(영어명;Jason Kim) 작가다. 그는 지난 9월 ‘프리즈 서울 2023’에서 김환기의 원작과 이를 디지털로 새롭게 구현한 작품을 함께 선보여 주목을 끌었다. 작가는 TV라는 디지털 캔버스를 이용해 김환기의 마지막 작품(7-Ⅶ-74)을 재해석했는데, 원작과의 조화 혹은 괴리 등 여러 궁금증을 자아내게 했다.
무엇보다도 김대환의 파격적 예술 활동은 디지털 아트로까지 예술 풍수를 확장시킬 수 있는지를 확인해보는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도 흥미를 끌었다. 원작이 새로운 작품으로 재탄생했을 경우 원작의 기운 역시 신작으로 전이(轉移)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2023년 9월 ‘프리즈 서울 2023’에 전시된 김환기의 마지막 작품(7-Ⅶ-74).
김환기의 원작을 디지털 아트로 재해석한 김대환의 작품. 스크린으로 구현한 동적 영상 작품 중 한 장면을 포착한 것이다.
먼저 김대환은 김환기의 에세이집인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작품의 영감으로 설정했다. 그는 김환기의 작품을 디지털 세상으로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스스로가 익숙한 ‘나’가 아닌 ‘작가(김환기)’로 변신하는 게 가장 중요한 첫 걸음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아집과 성격을 비워놓은 자리에 작가의 정보를 채워넣었다. 당시 작가가 살던 지역, 만났던 이들, 들었던 음악, 자주 가던 카페나 선술집, 읽었던 책, 영감을 받았던 사람들 등에 대한 정보를 컴퓨터 명령어로 입력시킨 후 작가의 원작을 하나하나 글을 읽듯 마음속에서 재구현했다.”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 놀랍게도 디지털 화면에서 재구성된 김환기의 작품에서도 김환기의 원천적 기운이 여전히 발현되고 있었다. 원작과는 달리 TV스크린이라는 소재, 동적 영상이라는 표현 방법 등으로 미세한 부분에서 기운의 양상이 달리 나타나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원작의 기운이 디지털 아트로 곧장 전이된 것으로 느껴졌다. 당시 전시 관계자는 “김환기 작품을 관리하는 환기미술관 쪽에서도 신선하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전했다.
‘프리즈 서울 2023’ 아트페어에서 김환기의 작품을 미디어 아트로 표현한 작품을 감상하는 관람객.
마치 ‘가상 현실’ 세계를 대하는 듯한 작가의 고백은 그의 실제 경험에서 비롯된다. 김대환은 서울대 미대에서 동양화과 및 디자인 복수 전공으로 학부를 졸업한 후 2020년 영국 왕립대학으로 유학하면서 미술 기획 연구 및 작품 활동을 병행했다. 그러다 코비드(COVID) 사태로 영국에서 고립되는 비대면 시대를 맞았다.
그는 이 기간 멀리 있는 한국의 가족이 그리워 화상 통화를 하면서 서로의 영혼이 위안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 또 가족간의 온기가 스크린을 통해 지구 반대편까지 전해질 수 있다는 사실, 마지막으로 이는 우리가 작품을 감상할 때 받는 감동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깨닫게 됐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차갑고 딱딱한 스크린(평면) 너머로 서로의 온기를 전하고 있으며, 이 온기는 사람의 ‘마음(철학)’을 반영할 때 그 존재 가치를 더욱 빛나게 한다는 것이다. 그가 밝힌 온기와 마음의 전달, 스크린을 통한 진짜와 가짜를 넘어선 경계는 풍수에서 중시하는 ‘기운(氣運) 교감’을 의미하기도 한다.
영국 본햄스 본사 전시에서 김대환 작가가 자신의 디지털 아트 작품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프리즈 런던 2021’ 아트페어에서 영국의 현대 예술가인 데미안 허스트와 함께 전시를 진행했고, 같은 해 겨울에는 런던의 사치 갤러리에서 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인 쿠사마 야요이(일본), 뱅크시(영국), 이우환(한국) 등의 디지털 전시를 성황리에 개최했다.
그는 국내에서 활동중인 한국 화가의 위상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데도 기여하고 있다. 지난 10월 세계 3대 경매사 중 하나인 본햄스 런던 본사에서 최초의 한국 화가 초청 개인전(김성희 작가)을 성공시켰던 것.이 전시는 한국 및 아시아 예술 시장에 관심을 가진 유럽 컬렉터들로부터 큰 환영을 받았다.
김대환은 이 전시회에서도 김성희 작가(서울대 동양화과 교수)의 원작과 함께 이를 디지털 아트로 해석한 자신의 작품을 대조적으로 배치하면서 호평을 받았다. 원작이 디지털 아트로 변신하는 과정까지 보여주는 이 전시회에서 김성희 작가는 “디지털 작품에서는 평면 작품에서 유추하기 어려웠던 다양한 기운의 흐름이 보여져서 좋았다”고 평가했다.
2013년 10월 영국 본햄스 본사에서 전시된 김성희 작가(서울대 동양화과 교수)의 원작(좌·우)과 김대환 작가가 이를 재해석한 미더어 아트 작품(가운데).
AR(증강현실), VR(가상현실), XR(확장현실) 등 신세계가 펼쳐지는 세상에서 젊은 예술가가 주도하는 디지털 아트가 예술풍수의 미래를 보여주는 듯하다.
안영배 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